▲정두언 한나라당 의원. 정 의원은 외국어고 등 특수목적고를 특성화고로 통합하고, 지원자격 제한 없이 추첨방식으로 학생을 선발토록 하는 내용의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권우성
하지만 나는 이러한 접근에 반대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현상 유지를 의미하기 때문이며 또 그러한 엉거주춤한 타협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시켰을 뿐이라는 전례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다소 시간이 걸리고 적지 않은 에너지를 쏟더라도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외고 문제(나아가 한국 중등교육 문제 전체)를 해결하기 위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여 논란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특히 한국의 미래나 우리 자녀 세대의 내일을 위해서 절실하다.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외고가 출범 당시부터 '외국어 영재 양성'이라는 설립 목적이 형식적인 명분에 지나지 않았으며 실제로는 평준화 체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중산층의 선발 욕구에 부응하려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외고의 학생 선발 기준이 이를 말해준다. 1991년 가을 서울시교육청은 외고 설립 계획을 발표하면서 입학 지원 자격을 내신 성적 5% 이하로 제한하겠다고 했는데, 이는 언어영재 양성이라는 설립 목적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이후 모든 외고의 학생 선발 기준에서 내신 성적 상위자는 움직일 수 없는 지위를 유지해 왔다.
이처럼 외고는 태생적으로 문제가 있는 학교이다. 명분과 실제가 다르며 우리 사회 구성원이 폐기하기로 합의했던 입시명문고를 버젓이 부활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에 대하여 일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반문하기도 한다.
비록 일부 문제는 있지만 이미 만들어진 학교를 없앨 수는 없지 않은가? 어차피 다른 고등학교들도 입시위주의 교육을 하는 마당에 유독 왜 외고만을 입시 위주의 교육과 사교육비 유발에 앞장선다고 비난하는가? 어느 사회에나 남보다 더 좋은 교육을 받고자 하는 수요층이 있기 마련인데 이들의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 것 아닌가? 국가 경쟁력을 위한 수월성 교육기관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외고가 그런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세계가 점점 더 글로벌화되고 있는 마당에 '글로벌 인재'의 육성에 앞장서고 있는 외고를 유지해야 하지 않는가?
이러한 반문들에 대하여 일일이 반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지면관계상 몇 가지로 압축하여 그 허구성을 지적하고 우리 사회에서 외고가 초래하는 병폐를 드러내고자 한다.
외고가 글로벌 인재 육성한다고? 교육개혁 가로막는 암적 존재!우선, 외고가 글로벌 인재 육성에 공을 세웠다고 하는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다. 단지 외국어를 잘하고 외국 명문대에 입학했다고 해서 글로벌 인재가 되는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글로벌한 시야와 실제로 세계 우수한 인재들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는 종합적 역량을 갖추는 일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인들(유학생과 미국이민 1.5세대)의 미국 명문대 중도탈락률이 절반에 가깝다는 보도는 외고들의 외국 명문대 진학교육이 얼마나 취약한가를 잘 보여준다.
혹자는 국내의 이른바 일류대학 진학 실적을 들어 외고의 공을 인정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은 외고가 잘 가르친 결과라기보다 본래부터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을 선발한 효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비난성 추측이 아니라 2007년 한국교육개발원에서 수행한 특목고 연구에서 입증된 결론이다. 이 연구에서 확인된 것은, 외고의 학교 효과는 없으며 외고생들의 높은 진학 실적은 단지 선발 효과나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 등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입시위주의 교육이나 사교육 유발의 책임이 왜 외고에만 있는 것처럼 비난하느냐는 볼멘소리에 답해보자. 외고가 사교육비 증가의 주범임은 상식이기도 하지만 전문적인 조사 결과에서도 확인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한국교육개발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외고 입시를 준비하는 초등·중학생들의 사교육비가 그렇지 않은 학생들보다 월등히 높았으며, 외고 재학생들의 사교육비 지출도 과학고나 일반고 학생들에 비하여 훨씬 높았다. 이것만으로도 외고의 존재 자체가 우리 사회의 사교육비를 증가시키는 요인이 됨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사교육비를 유발하는 근본적인 요인은 우리 사회의 그릇된 경쟁방식이며 구체적으로는 점수 경쟁에 기반하고 있는 대학입시 체제라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외고(특히 대도시 사립 외고) 역시 그러한 구조와 관행을 유지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난의 화살을 피할 길은 없다.
그 핵심적인 기제는 특권적인 선발 제도이다. 외고는 '언어영재 양성'이라는 허울뿐인 명분을 쓰고 다른 일반계 고교에서는 금지된 성적 위주의 선발을 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외고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성적 위주로 학생을 선발하는 대입체제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다. 학생으로서는 외고 입학이 명문대로 가는 급행열차이다. 그러기에 외고 입학 경쟁이 치열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어쩌면 외고의 가장 심각한 폐해는 외고의 존재와 작동 방식이 끼치는 중등교육의 퇴행적 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식의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한국의 학부모들은 명문대로 가는 급행열차를 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점수 경쟁에 몰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