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자 이름을 적도록 되어있는 기명 투표용지
이윤기
회의 성원, 정족수도 없는 회의와 투표
넷째, 이 회의에는 정족수가 없었습니다. 회의의 일반 원칙을 적용하자면, 총회원의 과반수 참석에 과반수 찬성으로 의결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학부모 총회에는 과반수가 참석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에 정족수 과반수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적어도 사전에 회의 정족수에 관한 원칙은 정해져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회의 당일이 되어서 참석한 학부형을 정족수로 하고 찬성과 반대의견 중에서 많은 쪽으로 결정하겠다고 발표하였기 때문에 사실 절차상 하자가 큽니다.
결국 학부모 총회를 부실하게 준비하였기 때문에 전교생이 994명인 학교에 112명의 학부모만 모여서 학교운동장에 인조잔디를 조성하자고 하는 무책임한(?) 결정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섯째, 회의를 위한 일반 규칙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학부모들의 의견을 묻는 투표 절차 역시 엉터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결정을 하는 투표라면 꼭 현장에 와서 투표를 하는 방식뿐만아니라 더 많은 학부모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도록 우편투표를 할 수도 있고, 혹은 토요일 오후까지 투표 시간을 연장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A초등학교 학부모 투표는 '놀토'가 아닌 토요일 오전에 당일 학부모 회의에 참석한 소수 학부모만을 대상으로 하여 치러졌습니다. 정족수에 비하여 워낙 적은 숫자인 112명의 참석학부모가 투표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이 학교 학부모 전체의 의사를 대표한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름 적어 넣는 기명투표, 그래도 문제 없다는 학교
여섯째, 기명투표입니다. 이날 투표용지는 학부모들의 생각을 묻는 설문조사용지인지, 혹은 투표용지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투표자 이름을 적고 인조잔디에 찬성하는지, 천연잔디에 찬성하는지 표시하도록 되어있었다는 겁니다.
학부모들이건 교사들이건 이런 예민한 사항을 투표로 결정하면서, 그리고 사실상 자녀를 볼모로 맡겨둔 학교가 추진하는 일에 대하여 이름을 적고 투표하면서 학교 입장과 반대되는 투표를 하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보통, 평등, 직접, 비밀선거는 초등학교 사회시간에도 다 배우는 민주주의 투표와 선거의 가장 기본이 되는 원칙입니다. A초등학교 학교운동장 조성 학부모회의와 투표는 이런 기본적인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진행되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이름을 적지 않은 투표용지를 무효로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더군요.
일곱째, 학부모 총회를 개최한다고 하면서 교직원 57명이 투표에 참여하여 학부모 투표와 합산하여 결정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교직원 의견이야 학부모 총회를 위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겠지만, 교직원들의 의견을 학부모 의견과 똑같이 반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학교장과 교직원들은 인조잔디 조성에 찬성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조잔디 조성 사업을 추진해왔습니다. 학교장과 교직원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해오던 인조잔디 조성공사가 유해성 논란이 벌어지면서 학부모회의를 통해 결정하게 되었기 때문에 학부모들의 의견만 반영하는 것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교직원 투표의 합산 여부와 상관없이 인조잔디 조성으로 결정이 났지만 절차상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민주주의, "찬성만 많으면 그만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런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학교장과 학교측에서는 절차상 전혀 하자가 없다고 믿고있다는 것 입니다.
A초등학교 인조잔디 운동장 조성 문제가 중요한 관심의 초점이 되었던 탓에 경남방송에서 기자와 카메라가 나와서 회의 전체 과정을 보두 촬영하였고 경남도민일보 기자분이 현장 취재를 하였습니다.
민주적인 회의 원칙을 지키지 않고 진행되는 학부모 총회와 학부모 투표를지켜보던 경남방송과 도민일보 기자가 투표가 끝나고 개표가 이뤄지기 전에 회의 진행과 투표 절차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교장선생님과 학교측에 문제제기를 하였습니다.
"초등학교 반장 선거나 학급회의도 이렇게 하지는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민주적 의사결정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학부모 총회를 이런식으로 진행해도 됩니까?"
경남방송, 도민일보 기자의 이런 질문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교장선생님과 학교측에서는 절차상 전혀 하자가 없었다고 학부모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인조잔디 운동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학교운동장을 인조잔디로 만드느냐, 천연잔디로 만드느냐 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모두 놓치고도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는 학교를 보면서 한국교육의 앞날을 보는 듯하여 가슴이 답답하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제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
마산YMCA 사무총장으로 일하며 대안교육, 주민자치, 시민운동, 소비자운동, 자연의학, 공동체 운동에 관심 많음.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하며 2월 22일상(2007), 뉴스게릴라상(2008)수상, 시민기자 명예의 숲 으뜸상(2009. 10), 시민기자 명예의 숲 오름상(2013..2) 수상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