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정 뚫은 자리. 그 주변이 쓰레기에 똥까지 싸 놓고 가서 너저분했는데 내가 거칠게 항의 하자 나중에 소리소문 없이 다 치워놓고 갔다.또한 세 개 팀이 한 장소에서 따로 따로 관정을 뚫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답변을 내놓으라 했더니 더이상 관정을 뚫지 않았다.
송성영
두 번째 찾아온 지질 조사팀 말고도 또 다른 경쟁사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빼빼 마른 조사원의 말에 의하면 모두 세 개 팀이 각각 관정을 뚫어 보고서를 제출해 입찰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세 개 팀 모두가 한 장소에 또 다른 구멍을 뚫어 조사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말문이 딱 막혔습니다. 한 군데에서 관정을 뚫는 데만 이틀은 족히 걸리고 있으니 얼마나 많은 자금이 투입되겠습니까? 호남고속철도가 지나갈 구간 구간에 뚫어야 할 관정은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것도 세 배로 말입니다.
"당신들도 뚫겠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단 조건이 있슈, 저번 인간들처럼 쓰레기 따위를 함부로 버리지 말고 말끔히 청소해 놓고 가겠다는 약속을 지켜야 할 것이고, 또 왜 무엇 때문에 세금 낭비해 가며 한 장소에서 세 개 팀이 번가라 가며 관정을 뚫어야 하는지에 대해 충분하게 설명해야 될 거유.""알겠습니다.""그러저나 이놈의 공사는 대체 언제 하는 거유, 지난봄인가, 공사를 앞당겨 9월쯤에 착공 한다고 지랄 덜 하더니 도대체 언제 시작한다는 거유, 사람 피 말리게 하고.""4대강 개발에 자금을 쏟아 붓고 있어서 정확히 언제 착공할지 우리도 잘 모릅니다." 개발지상주의, 이명박 정부도 개발 앞에서 갈팡질팡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날짜를 앞당겨 착공 하겠다고 난리 블루스를 치던 호남고속 철도 공사 때문에 이사 갈 터를 3년에 걸쳐 찾아 헤맨 끝에 겨우 잡아 놔더니 언제 착공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긴 4대강 개발에 미쳐 날뛰는 인간들이 더군다나 표도 안 나오는 호남고속철도를 서두를 이유가 뭐 있겠슈." 공사가 늦어지면 밭에서 살아가는 뭇 생명들과 더불어 당장 쫓겨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좋긴 했지만 새터를 잡아 놓고 이사를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뭔가 사기꾼들에게 된통 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사람살이가 왔다갔다 허는디. 이 이 인간쪼가리들을 그냥 확!" "저희들이야 뭐 지질조사만 하면 되지만 난감하시겠네요."두 번째 지질조사 팀이 난감한 표정으로 떠난 지 며칠 후 우리 식구가 출타한 사이에 누군가가 밭 주변에 너저분하게 널린 공사 흔적을 말끔하게 정리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지질 조사팀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세금 낭비해 가며 세 개 팀이 일정한 장소를 정해놓고 왜 무엇 때문에 뚫고 또 뚫고 또다시 뚫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해야 될 거요'라고 했던 내 말에 답변을 내놓기 곤란했던 모양입니다.
어쩌다 보니 벌레 얘기에서 개발지상주의자들 얘기로 빠져버렸군요. 하여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지질 조사팀이 무지막지한 관정 장비를 동원해 땅 속을 뚫어대던 그 무렵부터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농약을 뿌린 배추 모종은 물론이고 농약을 전혀 주지 않은 모종들 또한 멀쩡했던 것입니다(농약을 친 배추 모종은 열댓 포기에 불과 했고 예년처럼 농약을 치지 않은 배추 모종은 3백 포기에 넘었다).
관정을 뚫은 지점하고 배추밭하고의 거리는 불과 10여 미터, 배추밭에는 이상하리만큼 벌레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년 같았으면 배추 모종이 다 크기도 전에 벌레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야 할 것이었는데 다들 멀쩡했던 것입니다(지질조사를 하고 나서 한참 지난후 배추들이 다 자랄 무렵는 배추벌레들이 더러 생기곤 했다).
뭔가 개운치 않았습니다. 찜찜했습니다. 며칠 내내 밭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관찰 해 보았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밭 옆에 파 놓은 둠벙을 지나칠 때마다 물속으로 첨벙첨벙 뛰어 들었던 개구리가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가실 정도로 밭 곳곳을 파헤쳐 놓던 두더지 구멍조차 쉽게 눈에 띄질 않았습니다. 거의 매일 같이 밭 주변에 출근 도장 찍어대듯 했던 고라니 발자국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당벌레도 눈에 띄질 않았습니다. 해충뿐만 아니라 익충조차 눈에 띄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무엇 때문에 사라진 것일까?
문득 스치는 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익충이건 해충이건 간에 그들이 배추밭에서 사라진 것은 일주일 가까이 들려왔던 개발의 전주곡, 관정 뚫는 기계음 소리 때문일지도 모른다.'무디고 무딘 인간인 나조차도 일주일 가까이 들려왔던 그 소리에 머리가 어질어질 하고 속이 울렁거려 도망치고 싶었을 정도였는데 나보다 수십 배, 수백 배나 예민한 곤충이며 동물들은 오죽했을까 싶었습니다. 녀석들은 거대한 해일이 몰려오면 미리 감지하고 자리를 뜬다는 동물들처럼 조만간 고속 철도 개발로 배추밭이 죄 까뭉개 질것을 감지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고속철도가 뚫리기도 전에 새터를 찾아 나섰던 것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