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동 화백.
윤성효
이어 "다시 생각해 보자. 소파가 귀중하나 아이가 소중하냐. 아이가 소파를 더럽힌 게 아니라 소파에 무엇인가를 창작한 것이 중요하다. 아이의 위력, 생동감, 자랑스러움을 소파에 선언해 놓은 것이다. 그 때 아이를 나무라게 되면, 구겨진 아이의 마음을 되살리기는 힘들다. 아이가 항칠해 놓은 것을 보고, 1초만 참으면서 감상하고 평을 해주면 더 좋다. 그러면 아이는 자기의 행위를 사랑하게 되고,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부모님들은 부산에서 만화가게를 했다. 그는 "울산 살다가 아버지가 사시는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처음 집 앞에 가니 '만소잡화설지'(만화소설잡지)라고 되어 있더라. 세로로 읽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게 읽었다"며 "만화집 사장 아들이라 엄청나게 만화를 봤다"고 말했다.
진주 출신으로 <아기공룡 둘리>를 그린 김수정씨와 비교하기도 했다. 그는 "60년대 만화에 대해 이야기 하면 저를 이길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때 본 만화는 어마어마했다. 김수정씨는 어쩌다 만화책 한 권을 구하게 되면 여러 번 봤다고 한다. 저와 정반대였다. 제가 한번 보면 100권을 봤다면 김수정씨는 한 권을 100번 본 것이다"며 "광범위한 독서도 좋은데 깊이 있는 독서도 좋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 '만화방 가지 말자'와 '불량식품 먹지 말자'는 내용의 포스터를 그려 달라고 하더라. 비판의 대상이 우리 집이라 보니 그려야 하나 고민했다. 그려서 드렸더니 자장면 한 그릇을 사 주시더라. 아버지께 만화방 안하면 안되느냐고 했더니 아버지는 돈이 있어야 하지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는 만화가 천시를 받았다. 지금은 만화 대학이 생겼다."
박재동 화백은 "여자 아이들이 인형을 그릴 때 부끄럽다고 생각할 게 아니다. 그것도 그림이다. 당당하게 그려야 한다. 미술사에서 보면 만화도 회화이다. 자기가 좋아서 그리면 다 그림이다"면서 "캐릭터 그리는 것도 당당하게 생각하고 작품으로 여기고, 사인도 해라. 예술은 아닌데 하고 그린 게 나중에 가서 보면 예술이 된다"고 말했다.
박재동 화백은 중학교를 나온 뒤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쳤지만 떨어져 한 해 재수했다. "영화를 하도 보러 다니다가 공부를 안했다"고 한 그는 "재수하면서 친구들은 교복 입고 고등학생이 되었는데, 저는 어슬렁거리다가 시간이 나니까 만화를 그리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 때 114쪽 분량의 만화 <내 가슴에 봄이 왔습니다>를 그렸는데, 처음으로 완결한 작품이었다.
"그 때 만화를 그리면서, 만화를 그리는 것은 노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영감이나 의욕으로 시작했지만 완성시켜 가는 것은 노동이다. 항상 즐거울 수만 없다. 창고에 앉아서 계속 그려야 물건이 나온다. 만화는 소설로 그리는 게 아니라 엉덩이로 그린다는 말이 있다."그는 "인생에서 재수시절이 중요했다. 바로 명문 고등학교에 들어갔다면 실패나 낙오한 사람들의 마음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소중한 친구들을 그때 사귀었다"면서 "지금도 '고등학교 떨어져서 재수하고 만화를 그릴래, 만화 그리지 않고 고등학교에 바로 진학할래'라고 물으면 재수를 택하겠다"고 말했다.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1주일간 정학을 맞았던 추억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그는 "1주일 동안 다대포에 가서 유화 그림을 하나 완성했다"면서 "지금도 '정학 먹고 그림을 남길래, 정학 안 먹고 그림을 안 남길래'라고 물으면 그림을 남기는 것을 택할 것이다. 그림을 남기겠다는 사람은 무엇인가 기질이 있는 사람이다. 정학 먹은 것은 지금 제 인생에 아무 상관없고, 결혼하고 교수되는 데도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그림은 남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