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조성된 아도화상 진영은 지금 직지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직지성보박물관
아도는 모례의 집에 굴을 파고 살며 낮에는 가축을 치고, 밤에는 불법의 진리를 강론하며 3년 동안 살았다. 일찌감치 불교를 받아들였던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불교가 융성했으나 고유의 신앙과 외래 문물에 대해 배타적이었던 신라에서는 불교에 대한 수용과정이 쉽지 않았을 터였다. 이 역사적 사실에 역사와 무관한 전설의 아우라가 드리워지는 시점이다.
도리사가 열리기까지 만만찮은 곡절이 있었다. 장자 모례의 집에 머물던 아도는 홀연히 집을 떠난다. 모례가 가는 길을 물으니 "칡순이 내려오면 그걸 따라오라"고 한다. 그 해 겨울. 기이하게도 정월 엄동설한인데 모례의 집 문턱으로 칡순이 기어들어왔다.
그 줄기를 따라가니 아도가 있었고 그곳이 바로 신라불교의 첫 전래지인 도리사 터였다. 아도는 모례의 시주로 도리사를 세웠다. 그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결국 도리사가 '해동 최초 가람'이라 자랑하지만 그것은 공인된 사실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셈이다.
아도가 잠시 서라벌 나들이를 하고 돌아오는데 절이 세워진 태조산 밑에 때 아닌 복사꽃이 만개하여 눈이 부셨다. 이에 절 이름을 '도리사(桃李寺)'라 붙이고 마을 이름도 '도를 열었다' 하여 '도개(道開)'라 하였다. 이웃한 구미시 도개면이 그곳이다(현재 도리사 소재지는 해평면 송곡리다).
산 너머 도개면 도개2리에는 아도가 머물렀다는 모례의 집으로 추정되는 '모례장자터'가 있다. 또 '모례우물[모례정]'로 불리는 유적도 남아 있다. 이 마을을 아도의 첫 전래지역이라 여기는 근거다. 우물은 길이 3m의 직사각형의 돌을 큰 단지모양으로 쌓아 만들었으며, 밑바닥은 두꺼운 나무판자를 깔았다. 우물이 만들어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도리사와 더불어 아도와 인연을 맺은 또 다른 절집은 인근 황악산에 있다. 도리사를 창건하면서 멀리 김천 황악산의 명당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이듬해 절을 지으니 이 가람이 곧 직지사(直指寺)다. 세워진 순서와는 달리 지금은 직지사가 본사고 도리사는 그 말사다.
절집은 가파른 산길을 승용차로 좋이 5분여를 달려야 이른다. 올해는 때를 제대로 맞추었는가 하고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길가의 숲은 들뜨지 않고 차분한 황갈색이다. 산 중턱의 주차장에 닿을 때쯤 시나브로 불타고 있는 단풍을 만났다. 언젠가 내가 숨이 막힌다고 느꼈던 그 단풍일까, 아닐까.
지금의 도리사가 있는 곳은 창건 때 장소가 아니다. 원 도리사는 불타 없어졌고, 현재의 도리사는 그 부속암자였던 금당암(金堂庵)을 중심으로 중창한 것이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도 가파른 굽잇길을 하나 더 올라야 만나게 되는 도리사의 전각들은 다랑논처럼 층계를 지은 가파른 비탈에 띄엄띄엄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