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동에서 발견된 백자명기서울시 종로구 청진동 재개발지역에서 발견된 17점의 백자명기는 임진왜란 때 집이 불타면서 매몰된 것으로 보이며 16세기 후반에 명기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청진동은 그런 도시집중화에 따라 더욱 번창하던 시전이 있던 곳입니다. 그들은 관청의 아전이나 노비와 결탁, 공납을 이용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나온 자기는 판매를 위한 것이었든가, 아니면 상인이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명기로 쓰기 위해 구입해두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문화재청
16세기부터 한양의 인구는 급격하게 팽창했는데요, 그 이유는 바로 농촌에서 도망쳐 나온 유랑민들이 더러는 산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기도 했지만 일거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도시 인구팽창은 모든 시대와 나라를 막론하고 벌어지는데요, 농촌경제가 파탄나면서 도시집중화 현상이 벌어지고, 그 결과 도시를 중심으로 한 시장의 발달을 가져왔고, 그것은 조선시대 중인문화, 도시문화라고 할 수 있는 여항문화를 만들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어찌되었든 근대문명의 주체는 농민이라기보다는 시민들이었고, 개성이 아니라 정치의 중심지인 한양에서 성장한 상인과 그의 자본에 의해 견인될 중인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이 문화적으로 발전하면서 정치적으로 각성하려는 싹이 틀 무렵에 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은 집권 양반사대부에게는 위기이기도 하지만, 각성의 기회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내부결속에 의해 위기를 돌파하려는 그들의 집념은 훗날 인조반정으로 드러납니다.
전쟁이 남긴 것전쟁은 7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진주성을 지킨 김시민과 남해바다를 막아낸 이순신의 힘은 이 전쟁의 승패를 갈라놓았다고 할 만합니다. 바로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하늘이 도왔는지 전쟁이후 풍년이 거듭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국가의 시스템은 작동을 중지했습니다. 조선이라는 느슨한 농업중심의 유교국가가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부 약삭빠른 독점상인들에 의해 쌀은 매점매석되어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었습니다. 풍년의 효과는 조정에겐 더없는 하늘의 보살핌이었습니다만 백성들에겐 더 악몽이었습니다. 전쟁을 이유로 충청-전라지역의 세금은 가혹할 정도로 더 많이 걷어갔지만 왕실과 일부 조정대신들은 정권유지에만 이를 썼고, 백성들의 물가를 잡거나 치안의 유지에는 관심도 없어보였습니다.
임진왜란 시기에 다양한 형태의 어사들이 지방에 파견되었는데요, 대부분 세금을 걷어가기 위한 경우였던 것만 보아도 짐작이 됩니다. 그 틈을 타 관리들은 사리사욕을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의 분노는 들끓었고, 조정은 일본군보다 이것을 더 두려워하는 듯했습니다. 위기의 끝에 도달한 것을 직감한 왕실과 조정은 반란의 씨앗을 제거하는데 혈안이 된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곽재우를 비롯한 초기 의병장들은 반역자의 혐의를 두려워해 재빨리 관군에게 군사들은 넘겨버린 뒤 숨어야 했습니다. 빛나는 의병장이었던 김덕령은 결국 반역의 죄를 쓰고 무고한 죽음을 당해야 했던 것도 집권 양반사대부세력의 두려움을 드러냅니다.
전쟁이후 이루어진 논공행상에서 의병장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조정은 일본군을 몰아내고 전쟁을 끝낼 수 있었던 힘을 오로지 명나라의 원군에서 찾았습니다. 그 결과 전쟁을 직접 치른 장수들에게 주는 선무공신은 고작 18명. 그나마 김시민은 겨우 2등급에 불과했습니다. 반면에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청난공신 5명, 그리고 무엇보다 피난 가는 임금을 따라갔던 사람들에게 호종공신을 내렸는데 무려 86명. 그중에는 내시만 25명에다 말몰이 꾼 6명이 포함되었으니 전쟁 중 세상을 떠났으나 공신책봉도 받지 못한 억울한 장수들은 눈이나 감을 수 있었을까요?
이후 조선에는 의로운 일에 나서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어느 연구자의 기록이 가슴을 파고 듭니다. 임진왜란때 의병참전율이 전체 인구의 3.5%에 이르렀지만 대한제국이 멸망할 동안의 5년간 의병및 대일항전에 참가한 인구의 비율은 1.1%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마치 IMF경제위기 때 국가가 개인과 가족을 지켜주지 못하자 모두가 개인주의에 빠지고,가족이라는 울타리만을 의지하게 되었던 것처럼 임진왜란이후 조선 사람들은 개인주의화하고 가족이나 가문에 기대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그걸 탓할까요?
전쟁은 이후 집권사대부들이 탐욕을 응징할 에너지를 전부 쓸어가 버린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곽재우를 비롯한 실천적 지식인들은 몸을 사리며 백성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갓 태어난 도시의 중인그룹은 집권사대부들과 우호적인 분위기아래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으니까요. 그래서 조선은 다시 300년간 새 술을 담을 새 부대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비운의 종말을 맞아야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임진왜란은 그래서 조선왕조에겐 치명적인 결점을 드러내게 했지만 또한 그들의 명줄을 이어준 기회이기도 했던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