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 청화송죽인물문호경국대전세대들을 사로잡았던 청화백자의 강력한 힘과 자신감은 보이지 않습니다. 빈 공간을 드러내어 진리를 탐구하는 마음과 자연에 대해 사색하는 그들의 생활을 표현하였습니다. 인물들은 욕심을 버리고 자연에 묻혀 진리를 탐구하는 선비를 보는 듯합니다.
사철 푸른 소나무는 학문의 높은 경지를 상징합니다. 겨울이 되어 모든 잎이 떨어지고 난 뒤에야 소나무가 푸른 줄을 알게 되니까요. 대나무는 지조와 절개라고 표현되는 선비정신을 상징합니다.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대나무는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타협하는 것은 선비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성종임금도 서서히 훈구파가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법을 만들어놓고, 그 법위에 군림하는 그들에 대한 대항마로 새로운 세력을 조금씩 키워가고 있었는데 그들이 '사림파'입니다.
사림파라는 이름은 숲에 묻혀 글공부를 하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이름에서 보이듯이 그들은 벼슬을 하지 않고 공부를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훈구파가 가진 약점을 물고 늘어지기 위해서 정몽주와 길재를 복권시켜 자신들의 신념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명분으로 사용했습니다.
훈구파를 탄핵시킬 명분으로 삼은 것이 '의리론', 그러니까 단종과 세종사이에서 '불사이군의 원칙'을 어긴 공신세력들은 의리를 저버린 사람, 사대부로서의 자격을 잃어버린 사람이 됩니다. 이 이데올로기를 위해 영웅을 탄생시키는데요, 그가 바로 정몽주입니다. 그를 비롯해 사육신까지 '의리를 지킨 선비'들은 전부 복권되고, 반대의 경우는 모욕을 당합니다. 결국 '정몽주-길재-김종직-사림파'로 이어지는 새로운 세력이 정의로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림파는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훈구파와 달랐습니다. 한정된 국토에서 우량한 토지를 힘으로 빼앗아감으로써 축재를 일삼고, 매관매직을 통해 지방관리들까지 좌지우지하는 고도로 집중화되어버린 권력에 맞서는 방식으로 사림파는 작은 정부, 즉 여론에 의해 정치가 이끌어져가고, 지방자치(향약 등)를 통해 중앙정부의 전횡을 막는 행정조직을 지향합니다.
이런 지방분권적 정치는 농지의 개량과 지속적이고 전국적인 규모에서의 치수산업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는데요, 이런 경제적으로 진보된 사림파의 정책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거치면서 더욱 세련되어집니다.
이 시대의 도자기에는 이러한 사림파의 성리학적 이상이 담겨 있습니다. 선비정신을 담은 이시대의 도자기는 맑고 투명한 백자였습니다. 불투명한 분청사기가 사라진 것은 바로 이때입니다. 사림파가 나타난 이후로 분청사기는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왜 백색에 집착했을까?조선시대를 이끌었던 선비들은 청렴하고 결백한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습니다. 백자는 그런 선비정신을 담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한 점의 티끌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백자를 하얗게 만드는 것이 도공들에게 제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생산력이 낮았던 시대에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경쟁을 통해 승자만이 살아남게 하고 나머지는 도태시키는 상업적 자본주의적 문명이전에 '나누고 베푸는 공동체 문화'를 선택한 것이니까요.
퇴계이황과 율곡이이의 성리학 사상은 어렵고 난해한 것으로 치부되어버리는데요, 16세기 선비들을 사로잡았고, 조선의 정신을 낳았던 두 거장의 가치는 간단하게 말하면 당시의 '정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농장의 소유자이기도 한 선비는 농촌사회에서 구휼하고, 치수에 힘쓰고, 의료를 비롯한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를 가진 사람으로 규정함으로써 조선 성리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올려놓을 수 있게 합니다.
아직 모내기법이 보급되기엔 치수도 제대로 되지 못한 낙후한 시대였던 16세기는 천수답을 제외하고는 생산량이 지극히 낮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비옥한 토지를 독점해버리려는 중앙 권세가들에 맞선 사림파가 해결해야할 지상과제는 농촌사회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못한다면 훈구파와의 다를 게 없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성리학적 이상을 기반으로 한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집권할 수 있었던 힘이기도 합니다.
지극히 단순하게 퇴계의 사상을 표현하면 '생산량이 낮은 가난한 사회에서 다함께 배곯기가 선비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생산력이 높아지지 않는 한 있는 것을 나누는 방법이 가장 현명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퇴계의 정신은 농촌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이상사회를 꿈꿨는데요, 이후 유형원,이익,정약용으로 이어지는 남인 실학자들에게 적극적으로 계승됩니다.
반면에 율곡의 사상은 역시 단순하게 말하면, '조금이라도 더 생산력을 높일 궁리'를 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곡의 정신을 이어받은 서인들은 현실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인조반정을 통해 권력을 잡은 뒤로 대동법을 실시하고 화폐를 만들때까지 자신의 역사적 사명이 끝나버렸고, 그 이후로는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이후 율곡사상을 계승한 북학파 실학자들이 상공업에 눈을 돌렸습니다만 세상을 바꾸기엔 힘이 너무 약했습니다.
어찌되었든 모두가 가난한 시대의 산물이었습니다. 소비는 죄악이고 청렴결백이 미덕일 수밖에 없었던 성리학의 선비정신은 그런 시대를 살아가려는 지배자 양반사대부들의 자기 희생정신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더욱 '눈처럼 시리도록 하얀 백자'에 집착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이나 일본처럼 질 좋은 백토가 나와 버린다면 좋겠지만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백토는 완전한 하얀색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하얀색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요. 어쩌면 오히려 그렇게 조금 모자라는 흙으로 최고의 백자를 만들어낸 것이 조선백자의 위대함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