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플루 환자가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28일 오전 서울 양천구 이대목동병원에 의심환자들이 몰려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남소연
정부는 2009년 10월 27일 대국민담화(질병관리본부
http://www.cdc.go.kr/)를 통해 "고열이나 콧물 등 호흡기 질환이 하나라도 발생하면 신종플루 확진검사를 생략하고 동네의원에서 타미플루 등 항바이러스제를 투약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아침 내내 밀려드는 환자에 치여서 녹초가 된 후 겨우 점심이라도 먹으려고 휴게실로 왔다가 인터넷 포털 뉴스에 뜬 기사를 봤다. 이게 무슨 말인가?
콧물만 나도 타미플루를 투여하라?
말 그대로 열이 나지 않고 콧물만 나도 타미플루를 처방하라는 말이다. 물론 독감 증상이 고열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분명 '오버'다.
우리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는 5명인데 모두 모여서 사실 확인에 들어갔다. 비싼 타미플루를 처방했다가 진료비만 수십, 수백만 원 삭감 당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재희 장관이 나온 대국민 담화문이나 관련기관 누리집 어디에도 콧물만 나와도 타미플루를 처방하라는 말이 없다. 이건 분명 기자들이 장난질을 친 거다. (아, 이제는 기사 제목을 가지고 낚시질을 하는 기자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자기는 그 표현이 마음에 들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심장이 벌렁벌렁하는 사람들 심정은 생각 못했단 말인가?)
어쨌든 우리는 보건복지가족부나 질병관리본부 누리집에 들어가서 정황을 살폈다. 대국민성명에는 동네의원에서도 이제부터 신종플루 의심 환자에 대해서는 확진 검사 없이 바로 타미플루와 릴렌자를 처방하고, 환자를 진료한 동네의원은 치료거점병원으로 환자를 보내지 말고 즉시 진료하라고 나와 있다. 이어서 쓰여져 있는 문구가 눈물겹다.
"다시 강조 드립니다. 신종플루와 관련해서는 앞으로 어떠한 건강보험 심사 상의 불이익도 없습니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임상적 판단에 따라서 진료해주시기를 거듭 강조 드립니다."정부에서 발표하는 대국민 성명에 삭감 안 시킬 테니 제발 처방 좀 해달라고 통사정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마냥 삭감을 했다는 말인가? 사실 그런 면이 없지는 않다. 나도 매달 심사평가원에서 보내오는 삭감액을 보면서 화가 치민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신종플루에 대해 동네의원 의사들이 쉽게 처방을 못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거다. 진료비 삭감에 대한 공포!! (하지만 진료비 삭감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하자. 요지는 그게 아니니까.)
정확한 사실을 말하면 정부는 결코 콧물이나 기침 하나만 가지고 신종플루 치료제인 타미플루를 처방하라고 하지 않았다. 의사들이 소신껏 진료를 하면서 의심이 가는 경우에 처방하라고 한 것인데 대한민국 어느 의사도 콧물 증상 하나 가지고 독감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이제 보니 정부의 오버가 아니라 기자들의 오버였다.
변화무쌍한 정부 방침
이번 신종플루 사태를 보면서 의료인들은 정부의 처사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팍팍 들게 되었다. 동네보건소는 이처럼 국가 비상사태 수준의 정책을 받아들여 하루가 다르게 바꾸지 않는다(동네 보건소를 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의료인들은 진료를 하면서 여름이 끝나고 환절기에 접어들면서 독감이 더 크게 퍼질 거라고 예상을 했다. 물론 개인 위생이 우선이겠지만 추워지는 날씨에 집단생활을 하는 학교를 중심으로 공공장소, 버스, 지하철 등을 통해 확산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최근의 정부 지침은 이랬다.
- 2009년 5월: 환자와 접촉한 경우 등 역학적 연관성이 있는 경우에만 검사나 치료를 보험으로 함- 2009년 8월: 신종플루가 강력히 의심되거나 고위험군 환자에게는 거점병원에서 치료제를 투여할 수 있으나 일반 동네의원에서 투약기준에 해당되지 않는 환자에게 항바이러스제 처방시 약값은 환자 전액 본인부담하고, 해당되지 않는 환자에게 보험 적용시 금액 전부 의료기관 부담함- 2009년 9월: 기침, 콧물, 인후통 등을 동반한 고열 환자 중 신종플루가 의심되는 경우에는 의사의 판단에 따라 항바이러스제를 투여하도록 함- 2009년 10월 27일: 고열에 상관없이 의심되는 환자 모두에게 항바이러스제 투여하도록 함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느끼겠지만 엄청난 변화이다. 단 5개월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일선 의사들은 초기에 절대 항바이러스제를 처방하지 못했다. 함부로 약을 써서 낭비할까봐 정부에서 금지했기 때문이다. 의사들이 약을 쓰면 얼마나 쓴다고 궁색하게 굴었을까? 혹시 약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닌가? 의사들도 항바이러스제를 처방했다가 삭감 당하면 한 명 처방에 몇 만 원 손해를 본다. 바보 의사가 아닌 이상 절대 처방은 안 한다.
게다가 의심 환자를 진료한 경우 '법정전염병 발생 신고서'를 작성하여 인근 보건소에 즉시 보고하라고 했다. 이 서류를 작성해본 사람이면 잘 알 것이다. 나는 전에 결핵 환자를 진료하고 이 서류를 쓴 적이 있는데 작성 서류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더 황당한 것은 2년이 지나서 다시 관련 서류를 작성하라고 공문이 내려왔다. 몇 번 그런 경험을 하고나서부터 결핵 환자가 의심되면 무조건 보건소로 보냈고 치료는 하지 않았다. 다른 예로 볼거리(Mumps)인 경우도 법정전염병 서류를 쓴 적이 있는데 내가 표시하거나 써야 할 서류가 5장이다.
그래서 신종플루 의심 환자를 보면 의사들은 보건소로 보내거나 소위 거점병원이라는 데로 보냈다. 몇 달 동안 정부 방침이 바뀌면서 의협을 통해 알려왔는데, 도대체 약을 쓰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모호하게 적시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 며칠 사이 환자가 급격하게 증가하니까 부랴부랴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환자들에게는 항바이러스제를 투여해도 좋다고, 그것도 절대 의료진에게 불이익은 없게 하겠다고 맹세를 하면서까지 허용을 하고 있다.
담화문으로 국민 불안 덜 수 없어... 휴교 조치가 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