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동이. 실수로 깨트리면 시멘트와 철사를 이용해서 마치 헤진 양말이나 저고리를 깁듯이 땜질을 해서 다시 활용하곤 했다. 사진의 이 물동이는 과거에 어머니가 쓰셨던 것으로, 아들에게 넘겨준 몇 안 되는 보물 가운데 하나. 시멘트로 엉성하게 땜질을 한 저 손잡이에 어머니의 노고가 고스란히 묻어 있다. 지금 이렇게 해보라고 하면 아마 다들 미쳤다고 할 게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발생한다. 자원이란 그저 소비만 해도 괜찮을 만큼 무한정한 것인가?
김수복
그 아슬아슬함을, 그 안타까움을 내가 해본다 해서 안 될 이유가 있을까. 세상에 안 될 이유가 뭐란 말이냐. 그래 해보자. 해보는 거다. 키질은 내가 아직 어리고 작아서 안 된다지만 물동이야 까짓 안 될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리하여 딴에는 혼자서 연습을 한 뒤에 누나들 속으로 당당하게 진출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갖고 남몰래 연습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게 뭔가. 물도 없는 빈 동이를 머리에 이었을 뿐인데도 손을 놓는 순간 그대로 떨어지면서 퍽, 소리도 요란하게 박살나고 마는 것이었다. 그것은 키질을 하다가 엎었을 때와는 성질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그 이상한 배신감으로 나는 꼼짝을 못한 채 그냥 서 있어야만 했다. 그때 어느 순간 들려온 엄마의 목소리는, 지금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아이고오, 내가 참말로 못 살겄네에."땅이 무너지고, 하늘이 내려앉는다 해도 아마 그런 절망적인 목소리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지금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굵고 긴 한숨 속에 섞인 날카로운 비명과 짜디짠 눈물기 같은 것들이 나를 부들부들 떨게 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죽었구나, 아마 그런 심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나를 죽이는 대신 깨진 물동이 파편들을 들고 하나하나 맞춰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멘트나 철사 같은 것으로 땜질을 할 수 있는가 알아보는 것이었겠지만, 조각이 너무 많아서 재생은 이미 불가능해 보였다. 재생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엄마는 나를 향해 "저리 가" 한 마디 하고는 파편들을 후딱후딱 정리해서 대나무 숲에 내다 버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와서 그것을 발견하고 "저놈 때려죽인다"고 소리치기 전에 치워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에, 나는 또 하나의 물동이를 깨트리고 말았다. 그 날은 아버지가 멀리 나가신 것도 아니고 바로 옆에 고구마 밭에서 뭔가를 하고 계셨던 까닭에 정통으로 발각되고 말았다. 당시의 산골 마을에서 물동이 같은 오지그릇은 필요하다고 아무 때나 가서 간고등어 사듯이 사올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따라서 나는 이제 열 번을 맞아죽어도 싼 인간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나를 두들겨팬 이유는 그런 경제적인 이유보다도 "사내자식이 계집애 짓이나 하고 있다"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렇다고 이미 간을 봐버린 내 안의 탐미주의가 꼬리를 내렸을까. 아니다. 나는 얻어맞는 과정을 통해 진화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때, 고백하자면 여자가 되고 싶었다. 나는 왜 사내로 태어나서 저런 것도 못하는 것인가, 심히 억울하기도 했었다. 여하튼 여자에게는 남자에게 없는 뭔가 대단한 것이 있는 것 같았다. 그 신비감과 부러움이 아마도 나로 하여금 여자를 좋아하게 했을 것이다.
뭔가 대단해 보이던 여자들, 여자가 되고 싶었다실제로도 나는 형들과의 놀이에서는 별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시집 안 간 고모들이나 누나들 속에서는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다. 형들의 이야기는 소재가 너무나 빈약하고 하는 짓도 요새 말로 하자면 엽기적이어서 끔찍한 면이 있었다. 누나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이야기가 둘, 셋으로 새끼를 쳐 나가는 까닭에 끝이 없었고 하는 짓도 "어매 징그러라"하는 식의 괴성으로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등 무엇인가 끌어안고 싶어지게 하는 귀여움과 도발적인 면이 있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형들은 조폭 똘마니의 이미지를 풍기는 반면 누나들은 약사여래나 문수보살 같은 그림에 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