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서 들여다 본 감방 내부로, 침대는 물론 의자와 책상, 먹, 붓 등이 놓여 있다.
권기봉
1945년 '붉은 군대'가 진주하면서 사용이 중지되었다가 71년 들어 전시관으로 개방된 뤼순감옥. 하지만 이미 88년에 중국 국가중점역사문화재로 지정되었음에도 불과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의 출입은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4미터 높이의 담장 안에 점점이 산재되어 있는 옥사들을 돌아보는 느낌이 사뭇 진지할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감옥의 초입, 교도소장실 바로 옆에 안중근이 사형 직전까지 수감되어 있던 방이 있다. 넓이도 다른 감방의 서너 배는 됨직하고 먹과 붓, 종이, 책상에 의자까지 반입이 허용됐다고 한다. 안중근은 이곳에서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탈고했고, 사형 직전까지 동양평화론을 집필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안중근이 먹이나 붓 등을 사용할 수 있던 점에 미루어 국제적 인물인 안중근에 대한 감옥 측의 배려 혹은 안중근을 흠모하는 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교도소장이 직접 지켜봐야 할 정도로 중요하면서도 위험한 인물이 안중근이었고, 나아가 국제적 관심의 대상이었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안중근이 교수형을 당한 20여 제곱미터 규모의 사형장도 나중에 세탁장으로 쓰였다가 최근 들어 당시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의거 100주년이 되는 오는 26일 문을 열 준비를 하느라 곳곳에서 페인트 냄새가 진동을 하지만, 그래도 전시물만큼은 하나둘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듯했다. 교수형을 할 때 쓰던 올무와 의자, 바닥이 꺼지게끔 하는 장치 등 음습한 기운이 그대로 느껴지게끔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눈길을 휘어잡은 것은 벽면에 새겨져 있는, 1963년 8월 저우언라이 전 중국총리가 북한 학자들에게 남긴 말이었다.
"중일갑오전쟁(청일전쟁) 후 중조(中朝) 양국 인민이 공동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은 본 세기 초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전에서 이등박문을 격살할 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