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 사학자 정덕한(66), 지금까지 발견된 유물
이민선
'안양사'는 안양 정체성을 찾는데 중요한 역사적 유물이라고 강조했다. "안양사 는 고려건국 초기에 수 천 명 이상의 많은 승병(僧兵)이 거주 했을 것이다. 때문에 굉장히 큰 규모로 지어졌을 것" 이라고 말했다. 승군은 사찰을 본거지로 유지되는 지역 결사체로서 지역 주민 시주와 왕실 지원 아래 운영 되었다고 전한다.
안양지역 승군은 고려 건국초기 과정에서부터 고려 후기 최영 장군이 이성계와 마지막 저투를 벌인 '화원전투' 에 까지 등장한다. 승군은 고려 왕권을 지키는 유력한 군사력 이었다. 건국당시에는 반 궁예 쿠데타 군으로 활동했다. 최충헌 무신 정권 때는 왕권 수호 전투를 벌였고 최영 의 개성수호 전투 때는 이성계 군과 맞섰다고 정 씨는 전한다.
최충헌 무신정권 때 왕권 수호 전투에서 패한 뒤 안양사는 무신정권에 의하여 철저하게 파괴 되었다. 그 후 최영 장군이 다시 복원했다.
옛 안양사는 왕건 집권 후 4년 전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씨는 왕건이 건국 과정에서 고려 건국에 뜻을 함께한 능정(能政)이란 스님을 위해 '안양사'를 세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씨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60년 이다. 60년 가을, 유유산업 신축 당시 정씨는 시흥군(당시 안양지명) 청년학생단체협의 회장 자격으로 시흥군에 공장 신축허가 취소를 요구한 적이 있다. 국보급 유물이 두 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라시대 유물인 중추사지 당간지주(보물4호) 와 고려시대 유물인 삼층석탑(경기도 유형 문화재 122호)이다.
당시 시흥군수는 "한번 시행된 건축허가 취소는 불가능 하며 해체된 삼층석탑은 이전 복원하고 추후 공장 건축과정에서 출토되는 역사 유물들은 철저하게 수집 보존키로" 했다.
유유산업이 들어선 후 에는 더 이상 유물 발굴을 요구 할 수 없었다. 합법적 절차를 거쳐서 지은 공장이었기 때문. 지난 2008년 매장유물 발굴을 요구 한 것은 유유산업 부지가 안양시 소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안양뉴스 유포터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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