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남소연
"아버님이 경찰 하신 것을 저는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님이 경찰 하신 것은 직업이었다. 일제시대 때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의 직업으로 선택한 것이다. 제 선친은 절대로 친일을 위해 민족을 속이거나 압박을 가한 일이 없었다는 것을 단언한다."
작년 9월 2일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장관이 부친의 일제 순사 전력과 관련하여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에서 한 말이다. 당시 우리는 다소 착잡하기는 했지만 아비의 허물을 자식에게 물을 수는 없는 것이라 하여 그의 장관 부임을 적극적으로 반대할 수가 없었다. 바로 이런 문제를 법으로 규제한 것이 연좌제 배척법인데, 이성적인 사회라면 이 법에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있다.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을 받지 아니한다."(헌법 13조 3항)경찰은 작년 6월, 촛불시위에 참가한 죄목으로 이아무개(41·여)씨를 기소하면서 공안사범리스트를 조회하고 그 내용을 참고자료로 첨부했다. 여기에는 이씨의 부친이 1976년 민주구국선언의 유인물을 배포하여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는 것과 이씨의 남편 이인영 전 의원이 대학생 시절 시위를 주도한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잠깐 여기서 우리는 1976년으로 되돌아가 본다. 1976년이면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발악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이미 1975년에 서울대 학생 수천 명이 민주구국투쟁선언을 해 놓은 상태로서 정국은 날로 긴장국면으로 치닫고 있던 때였다.
"3·1절 57돌을 맞으면서… 이 나라는 1인 독재 아래 인권이 유린되고 자유는 박탈당하고 있다. 우리는 이 나라의 먼 앞날을 내다보면서 민주구국선언을 선포하는 바이다. 이 나라는 민주주의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 돼야 한다.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져야 할 지상의 과업이다." 1976년 3월 1일 저녁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 미사 및 기도회'에서 낭독된 성명서의 주요 내용이다. 이 성명서에는 함석헌 윤보선 정일형 김대중 윤반웅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문동환 이우정 등이 서명했다.
다음 날 3월 2일 박정희는 국무회의에서 서명자 명단에 김대중이 있는 것을 보고 "모두 다 잡아넣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열흘 뒤인 3월 10일 오후 서울지검은 '일부 재야인사들의 정부 전복 선동 사건'을 발표하면서 가담자 20명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입건했다'고 밝혔다. 서명자 10명 외에 선언문 제작에 관여한 문익환 이해동 목사, 이태영씨, 함세웅 문정현 신현봉 김승훈 장덕필 김택암 안충석 신부 등이 공모자로 추가됐다.
역사가들은 3·1민주구국선언을 한국 민주화 역사의 '꽃'이자 '명장면'으로 기록한다. 하지만 당시 독재정권은 이를 '명동사건'으로 칭하면서 '공안사건'으로 변질시켰다. 이것은 남산 부활절연합예배사건(73년)이나 민청학련사건(74년)과 마찬가지로 유인물을 증거로 반유신세력을 일망타진하는 수법의 전형이었다.
촛불시민 이씨의 부친은 바로 이 3·1민주구국선언의 유인물을 배포하다가 체포됐다. 따라서 이것은 독립운동에 버금가는 자랑스러운 개인 치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자랑스러운 치적이 이명박 정부에서는 자식에게까지 연좌되어 형사 처벌에 악용된 것이다.
일제 순사부장의 아들은 교육의 수장을 맡고 있는 반면 민주운동가의 딸은 촛불집회에 나갔다가 형사 처벌을 받아야 하는 현실은 우리를 허탈하게 만든다. 게다가 촛불집회는 국민의 기본권을 행사한 것에 불과하다. 헌법재판소도 야간시위금지에 대해 헌법 불합치 판정을 내리지 않았는가? 무엇보다도 촛불시민을 공안사범으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긴급조치 9호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