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춘
정태춘의 고향은 경기도 평택 끄트머리에 있는 갯마을 도두리이다. 일제강점기 때, 사람들은 갯물이 들고 나던 곳에 둑을 쌓았다. 소유와 경작의 문제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제 손으로 일군 땅에 대한 애착만으로도 너끈히 궁색한 살림의 고단함을 버텨낼 수 있었다.
마치, 식도처럼 깊숙이 육지를 파고들어온 서해의 끝자락에 도두리가 있었다. 둑을 쌓아 만든 간척지 위에 위태롭게 세워진 마을이어서 비만 오면 물에 잠기기 일쑤였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중에 징이 울리고 마을이 소란스러워지면 어김없이 둑이 터진 것, 어른들은 횃불로 어둠을 밝히며 가마니와 삽을 들고 터진 둑을 막기 위해 바닷가로 달려가곤 했다. 집에 남겨진 아이들은 열린 대문을 바라보며 밤새 알 수 없는 공포에 떨어야만 했고, 너나 할 것 없이 흙투성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올 때는 이미 동이 튼 뒤였다. 어른들은 그제야 비로소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
바다가 곁에 있었는데도 이 마을 사람들의 정서는 바다를 끌어안지 못했다. 고기를 잡는 대신 농사를 지었고, 미군부대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곤궁을 겨우 면했다. 바다는 생활의 터전이라기보다는, 생활의 터전을 위협하는 무서운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의 정서는 어른들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으니, 밥만 먹으면 바닷가로 뛰어가 고기를 잡거나, 개흙 진창에 들어가 물놀이를 하곤 했다. 더러 돌투성이 돌산에 올라가 해지는 서해를 바라보며 외부에 대한 동경을 품기도 했으리라.
정태춘의 시와 노래는 이러한 도두리의 정서가 출발점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 속에 녹아 있든 간에 그의 노래에 담긴 '애절' 혹은 '울림', '자유'의 정서는 도두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의 절창들은 대개 유년기의 정서와 이후 청년기의 '떠돎'에 기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그에 관한 이야기 또한 도두리를 아주 벗어나진 못할 것이다.
정, 박을 만나다1집 <시인의 마을>을 내고 음악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79년 어느 날, 정태춘은 박은옥을 만난다. 이후,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 부부가 함께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왔는데, 어느덧 30년이란다. 무탈하며 같이 살기도 힘든 시간을 노래를 부르며 함께 지나온 것이다. 의미는 부여하기 나름이라, 나는 지금 3년은 너무 짧고 300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긴 탓에 오로지 외길 함께 걸으며 노래한 30년이라는 시간만이 각별한 의미를 지녔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1978년 초가을 어느 날, 아직 어린 나는 한 손에 신문지로 돌돌 말린 돼지고기를 들고 또 다른 한 손엔 녹아 흘러내리는 아이스케키를 들고 먼지 폴폴 날리는 아리랑고개를 넘고 있었다. 아리랑고개는 버스 정류장, 뚱뚱한 표씨 아줌마네 정육점, 다방이 있던 함정리라는 마을과 도두리를 이어주는 유일한 길이었다. 도두리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야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고, 돌아올 때도 이 고개를 넘어 다시 선말고개와 말랭이고개라 불리던 비탈길을 두 개나 더 지나야 비로소 집에 닿을 수 있었다.
그때, 아는 얼굴 하나가 비스듬히 기타를 둘러메고 개척 교회가 있던 비탈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흰 고무신을 신고, 신발이 투정이라도 부리듯 먼지를 일으키며 고갯길을 내려오던 황톳길의 기타맨, 정태춘이었다. 열두 살 소년의 눈에도 고독과 우수가 비쳤을까. 왠지 외로워 보였다. 아니, 지루해 보였다. 그는 나를 보고 살짝 아는 체를 하곤 곧바로 버스정류장 쪽으로 발을 끌듯 걸음을 옮겼다.
며칠 후, 나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그의 노래 '시인의 마을'을 들을 수 있었다. 어찌나 신기했던지 갑자기 쌀을 씻던 엄마를 큰소리로 불렀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 사랑방에서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 불렀던 형 친구가 라디오에 나오다니….
이듬해, 나는 그의 얼굴을 텔레비전에서도 보게 되었고, 삼촌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나보다 나이가 많은 그의 조카를 통해 듣기도 했다. 열두 살 소년의 나이도 어느새 마흔을 넘겼으니, 벌써 30년 전의 일이 되어버렸다.
정·박, 거짓말 같은 30년 세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