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중구 송학동에 위치한 구 제물포구락부 - 인천에 양관이 거의 사라져 아쉬움을 남기지만, 그런대로 근대적 건축물의 면모를 갖추고 복원된 구한말 서구인들의 사교클럽이 남아있음으로써 당시 역사를 되새겨 볼 수 있어 다행스럽다.
박태상
인천하면 역시 서구열강들의 침탈과 구한말 수구세력의 결사적 저항으로 상징되는 '충돌과 긴장의 현장'이라는 표상적 의미가 좀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2007년 6월 구 제물포구락부(인천시 유형문화재 17호)는 스토리텔링 박물관으로 새롭게 오픈했다.
인천시가 중구 송학동에 6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복원한 제물포구락부는 1901년 세워진 2층 건물로, 1913년까지 독일.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미국 등 서양인들의 사교 클럽으로 사용되었고 이후 일본 재향군인회관 등으로도 쓰였던 암울했던 역사를 안고 있다. '구락부'라는 말은 영어 '클럽'(club)의 일본식 발음을 한자로 차용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건물을 보면서, 우리 민족의 수탈의 아픈 역사와 서구 과학문물을 개방할 수밖에 없었던 세계사적 대세의 흐름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이 건물은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찐(A. L. S. Sabatin)에 의해 설계되었다. 사바찐은 중국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1883년 조선 정부의 총리아문참의로 활동했던 뮐렌도르프에 의해 발탁되어 우리나라에 왔다. 당시 그의 직명은 영조교사로 왕국건설을 위한 도면작성과 벽돌생산을 위한 벽돌제조 가마를 만드는 것이 임무였다.
하지만 벽돌 제조 가마 계획안이 실행되지 않자, 인천 해관의 토목기사로 근무하면서 인천해관 청사, 세창양행 사택(1884), 인천 최초의 부두(1884년 말) 등을 설계했고 부두공사는 감독까지 맡았다. 그 이후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조선제물포 각국조계지도(1888), 각국공원(1888), 홈링거양행 인천지점 사옥(1898), 제물포구락부 회관(1900) 등을 설계했다. 그는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자 1904년 프랑스함선을 타고 귀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