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마사 옆 생태숲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군락을 이루며 피어있는 상사화
서정일
모후산은 인근 백아산과 함께 산세가 험하고 지리적으로 요충지인 탓에 6ㆍ25 당시 빨치산의 근거지였다고 한다. 더구나 유마사에는 전남도당이 은거하면서 인근 지역과 연계해 활동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기록에 의하면 '빨치산 전남도당은 백아산에 1950년 9월 25일 도당 유격대를 설치하여 자리를 잡고 노치, 동화계곡 등에 진지를 구축해 놓았으며 이후 유마사에도 은거했으며 이곳 빨치산은 광양의 백운산, 화순의 화학산, 영광의 불갑산, 담양의 추월산에 지령을 내리던 사령부였다.'
이 지역엔 당시 유마사를 비롯해 광복 전까지 15호 가량의 가옥이 있었는데 이 무렵에 모두 소실됐다고 하며 지금도 간간이 당시에 파 놓은 참호가 발견되기도 하는데 당시 진압군과 빨치산간의 전투가 3년 동안 치열하게 이뤄지면서 수많은 사상자가 속출했다고 한다.
전쟁사를 보면, 1951년 7월 20일경 화순 기동대 2개 소대와 광산경찰서 중대병력이 고지를 탈환했고 탈환한 고지를 지키기 위해 목포, 무안, 해남, 강진의 경찰, 노무원 등 480명을 주둔시켰으나 다음날 빨치산들이 이들을 완전포위 모두 사살했다.
이에 진압군은 곧바로 광주 20연대, 전남경찰국 대대, 화순경찰부대, 담양, 곡성경찰대 연합으로 전폭기를 앞세워 화학산까지 공격해 빨치산 대부분을 사살했고 일부는 백아산이나 지리산으로 도주했는데 연대병력이 주둔한 것을 감안하면 빨치산의 사상자도 수백 명은 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어느 지역보다 치열했던 전투였기에 흩어져있는 유골들이 많이 발굴된다고 하는데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지역에서 몇 명의 희생자가 있었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유마사 부근 생태숲으로 올라가는 길에 붉은 자줏빛을 띠며 군락을 이루고 피어있는 상사화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수행하던 이에게 한낱 육신의 욕심에 얽매이게 했던 땅이며 동족 간에 죽고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살육의 땅 모후산.
수행과 정진을 완성하라는 뜻으로 잎과 꽃을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인지 아니면 전쟁과 살육을 하려거든 비록 동포지만 만나지 말라는 뜻으로 상사화가 피어있는지 그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오로지 방문하는 이의 자유에 맡길 수밖에 없다.
낙안군과 낙안군 폐군(廢郡) |
현재의 순천시 외서면을 비롯해 낙안면, 별량면 일부, 보성군 벌교읍 그리고 고흥군 동강면, 대서면 일부의 땅은 옛 낙안군이었다. 하지만 101년 전인 지난 1908년 10월 15일, 일제는 항일투쟁무력화, 동학혁명진원지분산, 침략거점도시화를 위해 낙안군 자체를 없애버리고 주민들을 인근 지역 세 곳으로 강제 편입시켰다 |
덧붙이는 글 | 예고: [09-048] 소설 태백산맥의 현장 벌교를 찾아서
남도TV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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