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정리, 왜 중요한가?

등록 2009.09.16 08:59수정 2009.09.16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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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인간다운 특징은 자기의 과거를 돌이켜 살펴보는 것, 반성의 가치가 있다는 점이다... 남들과의 관련 없이 나는 있을 수 없다. 나와 남은 하나다." (함석헌, <우리 민족의 이상> 중에서)

 

인권이 철저히 무시되던 일제강점기는 말할 것도 없고 혼란으로 점철된 해방공간, 분단과 한국전쟁, 그 후에 이어지던 권위주의정권과 군사독재 하에서 배고픈 이 땅의 대다수 서민들은 자유나 인권같이 모호한 가치보다는 "먹고사는 문제"에 더 큰 관심과 열성이 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은 과거 절대빈곤에 처했던 한국인들의 절박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서글픈 속담이다. 그래서 인도주의나 이타주의와 같이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에 무게를 두기보다는, "뭐로 가도 서울만 가면된다"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처세술을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여태껏 별 고민 없이 받아들여 온 듯하다.

 

18년간 권좌를 유지했던 박정희도 아예 "인간사에는 경제가 정치나 문화보다 우선한다" 라고 단언했듯이 인간은 우선 먹어야 사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밥으로만 살 수는 없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정신적인 존재다. 정신적 존재라는 것은 역사적 존재라는 말이고, 역사적 존재인 인간은 그래서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 마침내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지고의 가치인, '민주주의', '자유', 인권'등의 도덕률을 되돌아본다.

 

그래서 1987년 대통령직선제를 시민들의 무혈혁명으로 쟁취하고 10년 후인, 1997년 '국민의 정부'와 뒤이은 2002년 '참여정부' 때에 민주주의의 열매라고 할 수 있는 인권의 가치를 다룬 과거사정리 문제가 활발하게 진행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선진국은 과학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사회라기보다는(조지 오웰의 '1984년'도 과학기술은 발달한 사회다)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가 존중받고 억울한 사람이 없는 사회다. 억울하게 기막힌 일을 당해 분노한 국민들이 넘치는 나라에서 국민통합과 화해를 꿈꾸기는 요원하다. 그리고 국민통합과 국민 간의 따뜻한 화해가 없이 사분오열된 나라가 선진국 문턱에 들어가기는 불가능하다.

 

인권, 자유, 민주주의의 가치는 어느 한 정당이나 지역만을 대표하거나 상징하는 가치가 아니다. 그것은 문명사회의 모든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하고 모색해야 할 가치다. 생명과 인권존중의 가치는 좌우, 보수진보를 넘어서 어느 가치보다 더 소중하다. 아직도 지난 권위주의정권과 군사독재 하에서 인권침해나 집단학살을 당한 무고한 희생자들과 그 유가족들은 반세기가 넘은 오랜 과거의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상처를 가슴에 지닌 채 오늘을 쓸쓸하게 살아간다. 이러한 그들의 아픔과 상처는 그들만의 아픔과 상처가 아니고 결국 한국인 모두의 아픔과 상처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슬프고 기막힌 이야기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야한다. 그들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고 그들이 행복해야 곧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 발가락이 썩어가는 데 몸이 건강할 수 없듯이 그들의 문제는 곧 나와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곧 인권국가, 선진국으로 향해가는 지름길이다.

 

하등동물인 아메바나 짚신벌레는 허리가 잘려도 그 세포가 각각 살 수 있지만, 고등동물인 인간은 허리가 잘라지면 가슴도 다리도 따로 생명을 유지할 수 없고 모두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유기체다. 그래서 유가족의 한 맺힌 설움과 슬픔은 곧 우리 모두가 끌어안아야 할 과제다. 인권문제에 대하여는 남과 나의 구별이 없을 때 비로소 대한민국은 참다운 의미의 인권국가로서의 위상을 국제사회에 높일 수 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결국은 도덕적 존재이고 정신적 존재이다. 그런 존재들의 집합체인 인류는 그래서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즉 억울한 사람, 상처 받은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는) 것에서 보람을 느끼고 삶의 긍지를 느낄 수밖에 없게 만들어졌다. 은행 강도들조차도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선 이기주의보다는 팀워크를 중시한 이타주의의 가치를 보여주어야 한다. 강자나 가해자보다는 약자나 피해자를 배려, 포용해 주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즉 이타주의가 현실로 드러나서 눈에 보이게 만들어 진 것이 세계의 '진실위원회'이고 '과거사정리' 기관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인간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면, 결국 피는 또 다른 피를 부를 뿐이고 결국 지구상에는 눈 먼 사람들과 이가없는 장애인들만 남을 것이다.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통쾌한 희열이 될 수도 있고 같은 사건의 재발방지에 본보기로서 효과적 방법이라는 주장도 일리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악순환의 연속은 끝이 없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처녀가 임신을 해도 할 말이 있다"는 속담처럼 가해자도 할 말이 있고(특히 우리 같이 이념으로 분단된 나라에서는) 그래서 가해자 처벌과정이 가해자들에게는 불공평한 또 다른 마녀사냥으로 느껴질 우려는 얼마든지 있다.

 

결국 나와 생각이 다르고 생긴 것이 다른 사람들끼리 함께 살아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 타고난 업보이고 동시에 축복이다. 다양성속에서 통합과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 민주사회가 추구하는 덕목이다. 그러나 가해자 처벌은 유보하더라도 피해자에 대한 사과(심지어 보상)는 한 사회가 건강하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억울한 감정이나 한을 품은 사람들이 수두룩한 상황에서는 화해나 일치를 추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진심으로 용서를 빌 때 피해자는 용서하는 아량을 보여주고 서로 화해할 가능성이 있지만 묵묵부답인 무정한 벽을 향해선 피해자가 아무리 용서를 하려고 해도 그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역사가 아프고 어두울수록, 진실을 알아야한다. 그리고 어떻게 그 아픈 과거 상처에 대해 치유해 나가는지를 정부는 국민들에게 이해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태양이 밝다는 것은 곧 그림자가 그만큼 짙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픔을 극복하지 않고 회피해서는 한 개인이 제대로 성장할 수 없듯이, 한 국가도 고통스런 과거사를 똑바로 직면하지 않고는 오늘을 바로 살 수 없고 올바른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인간은 어제, 오늘, 내일의 연장선 속에서 살아가는 역사적 존재기 때문이다.

 

스페인에서도 내전 당시 프랑코 군에 의한 공화파 의용군과 시민 대량학살에 대한 진실화해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지금도 고민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과거사에 대한 진실화해는 우리나라만의 과제가 아니며 많은 나라들의 고뇌다. 그리고 이러한 과제를 회피하기보다는 직시하고 정면으로 해결해야 민족통합과 발전을 이룰 수 있다. 고통스런 과거를 직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진실이 무엇인지를 앎으로써 우리는 장래에 보다 나은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

 

역사를 통해서 선은 권해지고 악이 징벌 받는(권선징악 : 勸善懲惡) 예가 확립되어야 우리 후손들은 올바른 역사, 정의가 승리한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인간의 역사는 마치 나무의 뿌리와 같다. 우리가 나무의 뿌리를 잘라버리면서 그 나무가 잘 자라기를 기대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역사와 과거를 무시하고 덮어두면서 우리미래가 찬란할 것이라는 꿈을 꿀 수는 없다. 인간사에 고통 없이 성취되었던 것이 없듯이 과거 없는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no pain, no gain; and no past, no future).

2009.09.16 08:59ⓒ 2009 OhmyNews
#함석헌 #진실화해 #과거사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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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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