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구가 콘크리트로 폐쇄된 다랑쉬 동굴이 있는 다랑쉬 오름
이규봉
다랑쉬 동굴에는 군경을 피한 마을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1948년 12월 18일 9연대 2대대는 이 동굴 입구에 불을 피워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모두 질식시켜 죽였다. 박석내 학살처럼 연대 교체를 앞두고 9연대가 무리한 전과 올리기로 민간인을 학살한 것이다. 1992년 이곳에서 유골을 발굴했으나 노태우 정권은 이 유골들이 묻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모두 화장하여 바다에 뿌리고 입구는 콘크리트로 막아 놓았다. 2002년 표석을 세웠으나 누군가 의도적으로 비석을 또 파괴하였다.
동굴에서 피난 생활하는 주민을 학살하다아직도 가해자는 반성은커녕 사실을 숨기려고만 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며 선흘로 향하였다. 가는 중에 목시물굴과 도틀굴이 있다. 목시물굴은 선흘 마을 사람들이 숨어살다가 대거 희생된 장소이다. 1948년 11월 25일~28일 사이 군인이 주변을 수색하다 노인을 발견하고 위협하여 도틀굴을 찾아냈다. 수류탄을 까 넣고 피난생활을 하던 주민들을 끌어내 15명을 처형하고 나머지는 연행했다. 그들을 고문하여 알아낸 곳이 목시물굴이다. 현장에서 학살된 사람만 최소 70여명이나 된다. 또한 밴뱅디굴에 숨어 있는 사람도 찾아내 학살했다. 단지 해안마을로 이동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렇게 학살당한 주민이 120명이 넘는다고 한다.
선흘에 도착하여 물을 마시다 주변에 쉬고 있는 동네 사람과 말할 수 있었다. 낙선동 성터를 찾는다는 말에 '왜 그곳에 가느냐'고 묻는다. 이유를 말해주었더니 4·3 사건을 아느냐면서 설명해준다. 그는 예상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물어보니 그 쪽 관련해 많이 쫓아다녀 귀동냥한 것이란다. 가끔 주민들에게 물어 보았다. 4·3 사건을 알고는 있었지만 자기 마을에서 일어난 일조차 자세히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 주민에게 "9연대장 박진경을 추도하는 비문이 아직도 있는데 알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며 당장 확인해 보아야겠다고 흥분하였다.
짐승만도 못한 함바 생활낙선동 성터를 찾아가니 막 복원을 끝내 상태였다. 1948년 10월 17일 송요찬이 내린 초토화 명령은 학살의 시발점이었다. 중산간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정든 삶의 터전인 마을을 버리고 떠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희생되었다.
소개(疏開)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견벽청야(堅壁淸野)' 즉 '꼭 지켜야 할 전략거점은 벽을 쌓듯이 확보하며, 부득이 적에게 내놓게 되는 지역은 인적·물적 자원을 이동하고 건물을 파괴해 적으로 하여금 이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작전'에서 사용된 말이다. 그러나 인적·물적 자원을 이동한다는 기본 방침을 무시하고 무차별하게 주민을 학살해 버렸다. 전시에서도 허용될 수 없는 범죄행위가 과거 일본군 장교 출신들인 국군 장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소개 과정에서 선흘 주민이 최소 120명 정도 희생되었다. 하지만 대책 없이 해안마을로 간 주민은 굶주림 속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다. 1949년 봄 이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마을 주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선흘 아래에 전략촌인 석성을 쌓았는데 이것이 바로 낙성동성이다. 이곳에서 주민들은 짐승 우리와 같은 함바집에서 짐승처럼 삶을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