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돌과 백돌로 엮어가는 두 영혼의 만남

<바둑 두는 여자>를 읽고

등록 2009.09.14 09:45수정 2009.09.14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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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의 피로 범벅이 된 총구를 입 속에 집어넣는다.

묵직한 소음, 땅의 흔들림.


나는 바둑 두는 여자 위로 쓰러진다. 내겐 그녀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 더 붉어 보인다. 그녀가 웃고 있다. 나는 우리가 저 위에 가서도 대국을 계속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바라보기 위해 나는 눈을 계속 뜨고 있으려고 애쓴다.

'바둑 두는 여자'의 마지막 장면이다. 무겁고 격한 감동이 천천히 치밀어 오른다. 소설을 읽고 이런 기분을 느껴보는 것 오랜만이다.

샨사, 작가 약력을 본다. 1972년생이다. 표지에 실린 그녀의 눈빛이 깊고 대담하다. 중국 출신으로 프랑스 정부 장학금을 받고 파리에 입성, 프랑스어로 소설을 쓴 지 3년 만에 문단의 최고 자리에 올랐다고 적혀있다. 결벽에 가까우리만치 단어와 문체를 갈고 다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는 소개말이 눈에 띈다.

바둑판을 읽는 전법으로 세상을 읽기 시작한 열여섯 살 중국소녀와 일본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전쟁에 뛰어든 일본군 청년장교는 1930년 초, 쳰휭 광장에서 만난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러나 흑돌과 백돌을 놓으면서 그들은 각자의 꿈과 현실을 은연중에 드러내며 상대를 읽고 서로의 욕망과 갈등과 불안을, 삶의 그늘을 느낀다.


바둑판 위에서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는 소녀는 반란군에 가담한 두 남자와의 만남과 이별을 거치며 한 여자로 성장하고, 장교는 동료의 고통과 포로의 처참한 죽음을 보면서 창녀와의 잠자리에 집착한다. 이 와중에도 소녀는 그 나이 특유의 천진함과 대담함으로 청년에게 다가선다.

소녀가 자신의 환상을 덧입힌 청년의 모습을 그려보이자 청년은 천황에 대한 굳건한 충성심에도 불구하고 깊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조국의 영광에 맹목적이었던 청년은 자신이 행한 살인과 폭력을 떠올리며 다른 방식의 삶에 대한 소망이 꿈틀거리는 걸 느낀다. 그러나 군대의 규율에 잘 훈련된 그는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택해 떠난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건 전란에 휩싸인 베이징에서다. 집을 떠나 혼자 떠돌던 소녀는 청년장교가 이끄는 소대에 잡힌다. 다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의 이름도 신분도 모르지만 서로의 영혼을 이해한다. 짐승 같은 욕정을 드러내는 일본군인들한테 포위당한 채 겁탈의 위기에 처한 소녀와 둘이 남겨진 청년 장교는 결단을 내린다. 그는 소녀의 관자놀이에 총을 쏘고, 그리고 자살한다.

상대가 구사하는 묘수를 통해 서로를 이해했던 두 사람이 목숨을 버리는 소설 막바지에 이르면 상실감이 밀려든다. 그 상실감은 생각 밖으로 깊고 크다. 소녀와 장교가 짤막하게 이루어진 각 장의 내레이션을 맡아 들려주는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 마지막 장까지 따라오느라 미처 깨닫지 못한 두 생의 비극이 주는 충격은 소설을 덮고 나서도 가슴을 한동안 먹먹하게 한다.

바둑판을 사이에 놓고 마주보며 의식하지 못한 채 서로에게 다가갔던 두 사람이 서로를 끌어안은 자리, 야만과 폭력과 살상의 세계의 소용돌이에 쓸려 추락하면서도 마지막까지 붙잡았던 순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죽음의 돌을 놓는 그들의 행위는 참으로 안타깝지만, 아름답다. 허영과 위선으로 가득한 시대, 늙고 추한 세상을 거부하며 패착의 돌을 집어들었던 두 젊은 영혼의 모습 위로 부릅뜬 눈과 단호하게 입을 다문 작가 샨샤의 표정이 겹쳐진다.

'바둑 두는 여자', 살아가는 동안 한 수 한 수 우리가 두어야 할 돌을 손안에서 가늠해보게 만드는 소설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국제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국제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바둑 두는 여자

샨 사 지음, 이상해 옮김,
현대문학, 2004


#샨샤 #바둑 두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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