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가 쓰는 도구가 꽤 현실적인 그림책입니다.
시공주니어
책에 등장하는 도구들은 꽤 사실적입니다. 늑대들이 집을 지을 때 사용하는 것도, 돼지가 집을 부술 때 쓰는 것도 모두 실제로 사용하는 도구들이지요. 그림책을 보면서 아이에게 도구에 대해 이야기 해주고, 우리집 근처에 새로 아파트를 지을 때도 쓰는 도구라고 설명해 주곤 했습니다.
최근에 저는 이 책을 일부러 읽어주지 않습니다. 쿠하는 집에서는 창 밖으로 한창 공사 중인 아파트 현장을 보고, 할머니네 갈 때는 철거 중인 재개발 현장을 자주 보기 때문입니다.
붉은 스프레이 캔으로 폭력적인 말들을 써 둔 벽이나, 반쯤 부수어 놓은 다가구 주택을 엄마 입장에서는 보여주기 싫었습니다. 몇 달 전, 이 책을 읽어줄 때 돼지가 구멍 뚫는 기계로 콘크리트 집을 부수는 장면을 보면서 "늑대네 동네도 왕십리 같다"고 해서 제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있기 때문이지요.
어른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적인 풍경이 아이에게는 그림책에서 본 이미지와 겹쳐지나 봅니다. 아이가 그런 말을 한 뒤로는 저도 이 책을 볼 때마다 재개발로 집을 잃은 사람들, 용산 참사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그림책 내용과 재개발은 아무 관계가 없지만, 집을 부수는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사람들의 고통이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빈민의 입장으로만 보면 피해의식이 생길 수 있지만 이 책에는 부자들이 생각해볼 만한 집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을 보여주는 대안도 읽을 수 있습니다.
아기 늑대들은 제 한 몸 잘 보살필 수 있는 좀 더 튼튼하고 안전한 재료를 찾아서 집을 짓는 동안, 안심할 수 있는 보안이 좋은 집을 지어나가는 동안, 초고층 아파트를 짓고, 입주하고, 방범 시스템을 고도화하는 부자들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아파트들이 세워지기 전 원래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요?
늑대가 집을 안전하게 짓는 실력이 느는만큼, 집을 부수는 돼지도 마찬가지로 실력이 발전합니다. 아무리 부자들이 좋은 집을 짓고 산다고 해도 결국에는 해결책은 다른 데 있다는 것을 멋지게 우화적으로 보여줍니다. 짓고 부수는 소모적인 싸움이 끝나는 지점은 동화 속의 늑대나 현실 속의 부자들이 더 튼튼한 재료를 찾아낼 때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들 가운데 하나인 꽃으로 집을 지을 때 비로소 돼지와 늑대는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림책을 읽으며 이웃과 차를 나누며 살고 싶은지, 콘트리트로 성을 짓고 싶은지,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먼저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쿠하네 할머니가 살던 동네 재개발 싸움판이 잘 끝나기 전까지, 이 책은 되도록 읽어주지 않을 생각입니다. 언젠가 할머니도, 우리도 꽃향기 나는 집으로 이사할 수 있다면, 그 때 다시 꺼내어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주고 싶은 책입니다.
아기 늑대 세 마리와 못된 돼지
헬린 옥슨버리 그림, 유진 트리비자스 글, 김경미 옮김,
시공주니어,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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