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신덕왕후 능침.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쳐주는 고석만이 조선 초기 석물이다.
이정근
돌보는 이 없이 잡초에 묻혀 있던 정릉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진 것은 선조 14년(1581년) 실로 172년만이다. 덕원에 사는 강순일이 임금이 행차하는 수레 앞에 나아가서 하소연하며 아뢰었다.
"저는 판삼사사 강윤성의 후손입니다. 지금 군역에 배정되어 있으니 국묘(國墓)를 봉사(奉祀)하는 사람들은 군역을 면하는 전례에 의하여 개정해 주소서."-<연려실기술>태조의 부모를 비롯한 네 조상(四祖)의 묘가 함흥에 있었는데 조정에서 한 사람씩 정해 '국묘봉사자(國墓奉祀者)'라 하여 군역을 면제해 준 전례를 열거한 조심스러운 복위(伏爲) 제청이다. 태종의 종통을 표방하는 왕권에 목숨을 내놓는 모험이었다. 강윤성은 신덕왕후 강씨의 아버지다.
이렇게 불거진 신덕왕후 복위문제는 왕대를 이어가며 논의를 거듭한 끝에 현종 10년 (1669년) 우암 송시열에 의해 마침표가 찍어졌다. 88년간 이어져 온 논쟁이었다.
"태종 대왕께서는 성대한 덕과 순일한 효성이 천고에 탁월하셔서 요임금이 전하듯 순임금이 이어받듯 질서가 정연하였으니 사변에 대처한 방법이 유감이 없었으나 유독 신덕왕후에 대해서만 능침의 의절에 손상이 있고 배향하는 예가 오래도록 결손 되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예관이 예의 뜻을 몰라 이렇게 된 것에 불과합니다.-<조선왕조실록>송시열의 차자를 현종이 가납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 과정에서 태종의 잘못된 조치를 바로 잡는다고는 차마 할 수 없으니 모든 죄는 당시 태종을 보필했던 신하가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다. 인조반정 이후 허약한 왕권을 끌고 가는 왕실에 대한 신권의 승리였다. 현종은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으로 끌려간 봉림대군과 군부인 장씨 사이에 태어난 인물로 조선 왕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임금이다.
이로서 신덕왕후는 복위되어 종묘에 모셔지고 정릉은 왕릉으로서의 상설을 갖추게 되었다. 때문에 정릉은 장명등과 고석 등 조선 초기 유물과 혼유석과 망주석 받침돌 등 현종시대 유물 그리고 고종 시대 비석이 혼재되어 있는 특이한 왕릉이다. 여기에 이번에 발견된 소전대가 추가되면 한결 의미 있는 문화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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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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