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사람들이 있어요'지난 1월 20일 새벽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 재개발지역에서 농성중인 철거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특공대가 컨테이너에 실려 고공투입된 가운데 농성 가건물이 불에 타며 무너지자 한 철거민들이 '저기 사람들이 있다'며 소리치고 있다.
권우성
지난 1월 20일 용산에서 목숨을 잃은 이상림 열사의 손자 동원이는 지난 겨울방학 때부터 여기, 순천향대학병원 영안실 4층이 집이다. 중학교 3학년 새학기를 여기서 시작했고 여름방학을 여기서 보냈다. 그리고 오늘 2학기 개학식 등교를 또 여기서 했다.
고 윤용헌 열사의 작은 아들 상필이와 고 이성수 열사의 작은 아들 상현이도 여기서 학교를 다니고 있지만 녀석들은 고등학생이라 그래도 마음이 좀 덜 쓰인다. 한창 사춘기라 예민할 열여섯살짜리 소년에게 할머니, 아버지, 작은 엄마랑 24시간 동안 한 공간에서 지낸 7개월은 어떤 시간이었을까? 게다가 다른 네 열사들의 가족들과 전철연 식구들까지 한공간에서 어우러져 살고 있으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닐 텐데 '가출'처럼 큰 사고 한번 안 치고 여전히 여기서 함께 먹고 자는 것만으로도 대견하고 고마운 일이다.
용산참사가 발생하기 전에도 공부에 취미가 크게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순천향병원으로 거처를 옮기고 나서는 책 한 번 제대로 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년에 가고 싶다는 용산공고에 갈 수 있을지 동원이도 나도 불안하다. 태어날 때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던 상필이는 지난 5월 서울대학병원에서 다른 한쪽 눈의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한달동안 울트라맨처럼 양쪽 눈에 알루미늄 고글을 쓰고 있느라 학교도 두달 가까이 가지 못했던 탓에 성적이 많이 떨어졌다. 중간고사에 불참해서 기말고사 점수의 90%를 중간고사 점수로 계산하기로 했다는데 점수가 영 신통치 못해 하위권 성적을 면하지 못했다.
무료과외선생님 등장에 10등 탈환 계획도 세우고이 녀석들을 여름 방학 중 양평이나 남양주에 있는 '스파르타식'기숙학원에 보낼까 가족들과 진지하게 의논하고 학원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4주에 198만 원이라는 엄청난 학원비에 허탈한 웃음만 짓고 말았다.
그러던 중 매일 용산참사 현장 생명평화미사에서 봉헌초를 판매하며 봉사하시던 모니카 자매님께서 반가운 제안을 해주셨다. 대학교 3학년인 자매님의 따님이 두 녀석들의 무료과외선생님을 자청해 준 것이다.
며칠 후 순천향대학병원 영안실에 자매님과 따님이 방문했다. 한 눈에 보아도 얌전한 모범생 같은 따님을 보고 우리 아이들이 장난꾸러기인데다가 몇 개월째 공부와 담을 쌓았던 녀석들이라고 걱정 섞인 인사말을 건넨 내게 반에서 꼴지하던 고1 학생을 한학기 만에 12등으로 끌어올린 적이 있다며 걱정말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그날부터 일주일에 세 번 하루 3시간씩 두 녀석의 공부를 책임져 주고 있다. 과외 선생님이 오시고 나서 녀석들은 저녁에 TV를 보는 대신 문제집을 꺼내 들여다보는 시간이 부쩍 늘어났다. 이불 깔고 뒹굴면서 TV 보는 것이 가장 큰 취미였던 동원이는 이제 선생님이 오시기 한시간 전부터 샤워도 하고 미리 문제집도 꺼내보면서 예습을 한다. 원래 조용하고 모범생인 상필이는 2학기 때는 반 10등을 다시 탈환하겠다고 다짐을 한다.
무한도전이나 1박 2일을 보면서 깔깔대고 웃다가도 열사분들께 상식(上食)[상가(喪家)에서 아침저녁으로 영연 앞에 올리는 음식]을 올려야 할 시간이 되면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목덜미 칼라가 낡아서 헤진 와이셔츠를 챙겨입고 지퍼식 검은 넥타이를 메고 영정 앞에 절하고 향을 피운다.
현장에서 용역직원들이나 경찰과의 충돌로 만신창이가 된 어머님들이 들어오시면 "힘들었지 할머니, 식사하셨어요?"라며 어른스레 위로를 하는 동원이와 어쩌다가 어머님들끼리 말다툼이라도 하면 엄마 손을 꼭 잡고 "엄마 그만하시고 참으세요"하고 나지막히 한마디 건네는 상필이를 본다.
그 참혹한 참사 후 7개월, 세상은 달라진 것이 없고 담벼락 같은 이 정권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지만 아이들은 이렇게 자랐다. 아니 성장했다. 계절이 세 번 바뀐 지난 7개월은 우리 아이들이 어른스러워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니 사실 이 녀석들이 이곳 식구들 중 누구보다 낫다.
오랫동안 일식집을 운영하셨고 참사 직전까지 삼호복집을 운영하시던 고 양회성 열사의 두아들 종원이와 종민이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일식조리사이셨던 아버지를 이어 일식 조리사를 꿈꾸던 두 친구는 6개월 넘게 칼을 잡지 않아 손이 굳어간다고 걱정을 하던 중 외삼촌의 소개로 다시 일을 시작했다. 둘째 종민이는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 11시가 넘어서야 순천향대학병원 영안실로 돌아온다. 3주간 일하면서 살이 7킬로그램이나 빠졌단다. 좋아하는 소주 한 잔 마실 시간 없이 들어오자마자 씻고 바로 잠드는 종민이를 보며 잠이라도 한 번 이불 펴고 제대로 마음 편히 자고 나가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몸도 마음도 다 아프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