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울창창과 붓 한자루 배낭에 메고...

울창한 숲에 고마워하는 초가을날 이야기

등록 2009.09.07 11:56수정 2009.09.07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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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사에는 울울창창한 숲이 있었다. 키가 큰 아름드리 전나무 숲길도 있고 키가 크지 않아 먼지를 온 몸에 받지만 꽃향기를 풍기며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이름모를 꽃들도 많았다. 답답할 울과 푸름시원한 창의 의미를 가슴에 새겼다.


키 작은 나무만 있는 숲과 키 큰 나무만 있는 숲은 울창한 숲이라고 부르지 않고 서로 다른 종류의 나무들이 잘 어울려야만 울창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서로 비슷한 사람과 뜻이 맞는 사람끼리만 유유상종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에게 무언으로 가르쳐주는 것도 같다. 

숲으로 가는 길은 햇살 환한 길도 있었지만 컴컴한 동굴도 지났다. 국립공원입구에 있는 큰 사찰은 박물관도 있고 보물도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사람들이 인산인해였다. 일행과 떨어져 한적한 암자 마당의 꽃나무 옆에 가만히 앉았다. 아무도 없는 고적한 산사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 많아도 아무 소리를 못 듣기에 누군가는 항상 조용해서 참 좋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눈으로 보이는 움직임에서 오히려 더 소리없는 아우성의 환청이 들린다. 사람도 없는 흙마당에 나비와 잠자리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는데 갑자기 방에서 스님이 나와서 마당을 여기저기 보고 다닌다.

내가 있는 자리도 쳐다보고 나무위의 매미도 쳐다보면서 갸웃갸웃한다. 암자의 두꺼비집도 열어보고 하다가 내가 앉은 근처로 와서 빙빙 돈다. 아차! 하는 느낌에 손을 귀에 가져갔다. 그리고 보청기를 꺼버렸다. 보청기는 마이크처럼 바람이 들어가면 큰 모기소리같기도 하고 삐삐소리같기도 하고 먼 우주비행접시같은 아득한 소리를 내는 것이다.

보청기를 끄니 스님이 들었던 소리도 사라졌는지 스님은 그 소리의 정체가 뭐였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그냥 고개만 갸웃하며 방으로 다시 들어가셨다. 스님이 들어간 승방의 섬돌에는 하얀 고무신이 가지런하다. 


숲을 되돌아 나오는 길에 전나무 숲길이 햇빛을 가리워 시원한 숲길이 끝나자 먼지로 분칠을 했는데도 살랑거리면 웃는 코스모스와 들국화가 마음을 해맑게 씻어준다. 

숲을 다녀와서 숲에게 배운 마음 하나를 화선지에 풀었다. 연한 흙색이 들어간 화선지에 자향묵을 곱게 갈아 주묵을 약간 섞어 음양의 조화를 본받고자 하면서 서로 다른 크기와 글씨체인 용비어천가와 풀뿌리 민체를 잘 어울리게 해보았다.


울울창창 용비어천가체와 민체의 서로 다른 글씨체를 활용해 울울창창이란 내용을 창작한 글. 전라도의 어느 묵향대회에서 운좋게 당선됨
울울창창용비어천가체와 민체의 서로 다른 글씨체를 활용해 울울창창이란 내용을 창작한 글. 전라도의 어느 묵향대회에서 운좋게 당선됨대한민국마한서예,문인화운영위원회

마감을 하고 낙관을 하여 우표를 붙이고 전라도 예향으로 보냈다. 울창한 숲을 사랑하는 자연인들의 마음에 공감을 끌어주었던 것일까?  장원후보라며 현장최종휘호를 해서 본인작품이란 것을 증명하라는 연락이 와서 잠들기 전 자향묵을 다시 곱게 갈아놓고 붓을 마음씻듯 잘 씻어 챙겼다. 배낭에 붓 한자루와 사과 한 알 담아 덜컹 덜컹 무궁화호를 타고 잘 다녀왔다.

그렇게 붓 한자루 배낭에 메고 홀홀히 다녀오니 마음이 초심자처럼 남작해졌다. 텅 비는 충만을 맛보기에는 때가 너무 탔지만 그런대로 엎드려서 붓을 잡고 하루를 시작하면 절로 많은 것들이 내 위에 존재함을 느끼게 되고 하루살이가 과히 무겁지가 않다. 울창한 숲에 새삼 고맙고 바람과 빛과 감로수가 좋은 초가을의 주말이 이렇게 지나갔다.
#울창한 숲 #한글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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