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당을 지나 자리 잡은 공부사. '공부'는 두보가 청두에서 얻은 벼슬에서 이름을 따왔다.
모종혁
조정은 망했어도 산하는 그대로요, (國破山河在)
성 안에 봄이 왔으나 초목만 무성하네. (城春草木深)
시대를 슬퍼하니 꽃을 봐도 눈물이요, (感時花淺淚)
이별이 한스러워 새가 울어도 놀라는구나. (恨別鳥驚心)
봉화는 석 달이나 계속 타오르고, (烽火連三月)
집에서 온 편지가 너무나 소중하구나. (家書抵萬金)
흰 머리를 긁으니 자꾸만 짧아져, (白頭搔更短)
이제는 아무리 애써도 비녀조차 못 꽂는구나. (渾欲不勝簪)
- '봄의 소망'(春望) 전문
'봄의 소망'은 내가 고등학교 때 배운 시다. 지은 이는 중국 시문학의 성인(詩聖)으로 추앙받은 두보(杜甫, 712~770)다. 그는 허난(河南)성 공(巩)현 출신으로, 조정에 나가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장안(長安, 지금의 시안)에 오랫동안 살았다. 쓰촨(四川)과 별다른 인연이 없던 두보가 청두(成都)에 오게 된 이유는 안사의 난 때문이다.
755년에 일어난 안사의 난은 당나라의 명운을 바꾼 대전란이었다. 8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당나라 인구는 무려 70%가 감소했다. 전란 전 890만 호에서 293만 호로 약 3000만 명의 인명이 죽어간 것. 이는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최악의 킬링필드였다.
안사의 난은 중흥의 길을 걸었던 당조를 급속히 몰락시켰다. 당 현종은 한때 개원의 치를 이끌었지만, 환관과 외척의 전횡과 부패를 막지 못해 안록산과 사사명의 반란을 자초했다. 반란은 율령제의 변질, 균전제와 조용조의 변화, 부병제의 붕괴 등 시대적 혼란상과 더해져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부패한 관리의 수탈로 경제적 기반을 잃은 중소 농민층이 반란군에 적극 합세했기 때문이었다.
낙양에서 흥기한 반란군이 장안을 향해 물밀듯이 쳐들어오자, 현종은 양귀비 및 몇몇 측근과 함께 쓰촨으로 달아났다. 쓰촨으로 가는 도중 양귀비는 황제 측근과 호위군의 강요로 자살했다. 현종도 황위를 태자에게 양위하고 쓸쓸히 남은 생을 보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