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두기지 입구에 있는 청동 판다상. 청두기지는 중국 최초로 설립된 과학적인 판다 연구 및 번식기지다.
모종혁
2차대전 때 의연한 죽음 맞은 판다, 영국인 감동시켜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판다의 개체 수는 수천 마리로 줄어들었다. 판다의 국외 밀반출도 성행했다. 서구 국가에서 판다의 인기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이를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30년대 청두에 거주하던 영국인 덴젤 스미스는 판다의 광팬이었다. 그는 1936년부터 3년간 막대한 비용을 들여 판다 확보에 나섰다. 당시 중국은 중일전쟁 기간으로 야생 동물에 대한 관리와 감독이 허술했다. 이를 이용해 스미스는 6마리의 판다를 영국으로 밀반출하는데 성공했다.
영국으로 보내진 판다는 런던동물원에 고가에 팔렸다.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런던은 날마다 독일 공군의 폭격을 당했다. 런던동물원도 재난을 피하지 못했다. 폭격으로 대부분의 판다가 죽음을 당했는데, 한 판다의 죽음은 영국인을 감동시켰다.
이리저리 폭탄이 터지는 와중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사육사 옆에서 고요히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판다에 매혹당한 영국인들은 2차 대전이 끝난 뒤 판다를 다시 데려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중국정부의 강화된 통제로 단 한 마리만 수입할 수 있었다.
1940년대 말부터 판다는 중국정부가 관심을 기울이는 멸종위기 동물이었다. 1949년 들어선 사회주의 정권은 무엇보다 판다의 가치에 주목했다. 수천 마리밖에 남지 않은 희귀성에다 서구인들이 판다를 너무나도 좋아했다.
중국정부는 처음으로 판다를 지키기 위한 행동에 나섰다. 판다에 대한 밀렵을 금지하고 해외 밀반출을 철저히 막았다. 판다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도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은 인민들의 먹는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최빈국이었다. 특히 1950년대 말 중국 경제를 파탄시킨 대약진운동은 수천만 명의 아사자까지 발생시켰다. 1976년 문화대혁명이 끝날 때까지 판다의 체계적인 보호와 연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서구 국가와의 판다 외교는 판다의 생존과 지위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왔다. 1972년 4월 중국은 자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판다 링링과 싱싱을 선물했다. 같은 해 10월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기념해서는 판다 캉캉과 란란을 일본에 대여했다. 이후 영국, 프랑스, 독일, 멕시코 등과 수교 시 선물로 보내진 것도 판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