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을 터뜨리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조문객
김창규
잘 가오, 우리의 한을 진심으로 이해했던 이여부친은 어렸을 적,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잠을 잘 때 매일 소리를 지르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친구 집에서 자고 왔더니 그게 아니었단다. 내게 할아버지는 인자하고 자상한 사람이었지만, 밤만 되면 죽음과도 같았던 고문의 악몽으로 평생 육체적인 후유증과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려야 했던 사람이기도 했던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또한 그러했기에 말뿐이 아닌 온몸으로 그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김대중은 신념을 버리지 않은 탓에 평생을 가택연금과 고문에 시달려야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어마어마한 고통과 가족들의 눈물 때문에 목소리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가슴 한구석 피로 맺힌 응어리가 있다. 나는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은 전라도 사람들의 한이 그런 것이라 본다. 아무 죄도 없이 죽어갔지만 그 억울함을 호소하면 빨갱이가 되어 버리는 세상. 억울함을 호소하면 차별하고 무시하고 짓밟는 세상. 김대중 이름 석 자를 말하면 빨갱이가 되기에 선생님이라 부르며 숨을 죽여야 하는 세상. 겨우 뱉은 선생님이란 한 단어도 '슨상님'이라며 조롱하고 짓밟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김대중은 그들에게 유일한 대변인이자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 당한 사람들을 인터뷰하러 가면 대부분이 거절을 한다. 세상이 바뀐 줄 알고 말했더니 그 다음 정권이 와서 잡아가고 또 세상이 바뀐 줄 알고 말했더니 또 잡아가서 고문을 하니, 이제 그 두려움 때문에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 두려움과 한이 지난 10년 사이에 조금은 녹을 수 있었다. 만약 그 10년이 없었다면 감히 일개 국민 따위가 정부를 상대로 억울한 죽음과 학살을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2011년부터는 제주 4.3사건을 정부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서 제외한다는 이 시점에서 다시 억울하고 한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날까봐 너무 가슴이 아프다.
보수들이 형님처럼 따르는 나라 미국. 그리고 그 미국에 인정받기 위해 언론조작까지 서슴지 않았던 과거 독재 정권. 하지만 실제로 찰떡궁합이었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전두환 정권을 위협하면서까지('손석희의 시선집중' 8월 20자 인터뷰 전문 참조) 구하려고 했던 사람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과연 몇 명이나 알고 있을까.
세계 강대국들이 모두 모이는 에이펙이나 아셈 같은 국제 회의에서 아시아 변방의 한 대통령이 우선 발언권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국제 분위기는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까. 프랑스의 총리가 살아가야 할 힘이자 도덕적 스승이라고 말하고, 독일과 미국의 수장이 앞다투어 존경심을 표하는 대통령. 아시아 유럽 정상회의에서 모두 이름만으로 소개를 하지만 오직 김대중 전 대통령 앞에만 "excellent leadership, President Kim"이라고 말해도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그런 대통령을 우리는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까.
세계가 구하려 했지만 한국이 죽이려 했던 사람. 한국의 독재자가 죽이려 했지만 세계의 양심들이 구하려 했던 사람. 기득권층은 빨갱이라 욕하지만 응어리를 가진 사람들은 말 없이 지지했던 사람.
그가 떠난 후,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역사를 편향된 논리의 독점 글쟁이들에게 맡기지 않겠다고 다짐해 본다. 나도 그처럼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깨어나 우리 후손들에게 진실을 전해 주고 싶다.
잘 가시오, 세계의 영웅. 그리고 우리의 한을 진심으로 이해했던 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