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집 옥상에서의 가족모임늦은 계획으로 숙소를 구하기가 어려워 어머님의 제안으로 고향집에 모여 옥상을 이용해 토요일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현실에서 내 역할 찾기는 가족모임의 제안과 실행을 주도하는 데까지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서치식
생활에서 맡은 최초의 내역할은 주말동안 어린 형서를 돌보는 일이었다.
사고 후 현실 속에서 나의 존재는 그저 몸이 불편한 장애자로 '환자'일 뿐이었다. 사고로 몸이 불편해지면서 내 사랑하는 집사람이나 부모님, 형제에게도 난 언제나 어디서나 끊임없이 배려하고 보살펴야 할 '노약자'로 취급되고 있었다. 처음 그 사실을 인식하고 든 생각은 서운함이었고, 나에 대한 배려를 오히려 "차별"로 오해하며 적대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니 그들의 그런 행동은 당연했으며, 그들 눈에 내가 그렇게 비춰진다는 사실을 나 스스로 인정해야만 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걸 오히려 내 재활의 동기(動機)로 삼아 나가기 시작했다.
내 사랑하는 가족들 눈에 그렇게 보이고 그들에게도 장애자로 취급 받아야 한다면 다른 사람 눈에 비춰지는 나의 모습은 어떨지에 생각이 미치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날 제일 많이 이해하고 감싸 주려하는 가족들 눈에도 그렇다면 재활을 통해 나 스스로 동작을 개선해 그들 눈에 멀쩡한 모습으로 보이고 인정받으면 그 뿐이었다.
혼자 재활에 열중 하다보면 내 동작이 뚜렷이 개선 된 것을 느끼고 가족들에게 그걸 확인 받고 싶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그랬다. 서울에서 생활하는 집사람에게 수시로 전화 해 "무슨 동작이 이젠 가능 해졌고 어디가 어떻게 좋아졌다"고 했으며, 다니러 오면 그것을 보여주며 확인받고 싶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정말 사소한 동작 하나가 비로소 불안하게 개선되는 정도였고, 모든 게 '정상'인 그들 눈에는 당연한 동작일 뿐이었다.
그러니 내가 그런 동작의 개선에 대해 가지는 관심과 가족들의 그것은 뚜렷한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처음엔 그들이 내게 관심과 애정이 없어 그렇게 내 재활 성취에 대해 그렇게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생각해 서운했으며 그것을 표현하기도 했다. 당연했다. 내가 처한 상황과 아무리 가족이라 할지라도 내가 처한 상황과 그들의 처지가 가지는 괴리는 너무 컸던 것이다
현실에서의 나의 존재는 거의 실체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가령 집안일에 대한 논의나 하다못해 친척들의 애경사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 것까지 집사람이 중심이었고 나는 철저히 배제되고 있었다. 그걸 알자 마음으로부터 그런 상황에 대해 거부감이 일며 그런 상황을 개선하고 실생활에서 내 역할을 늘려나가기로 했다.
현실에서 최초로 내 역할 찾기에 나선 것은, 전에 기술한 바 있듯이 생활을 위해 경제활동을 해야 하는 집사람이 여건상 못하는 부분을 도우는 일로 토요일 오후면 집근처의 재활병원에서 외박을 나와 아파트 단지안의 어린이 집에서 사랑하는 딸 형서를 데려다 돌보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거기서 시작된 나의 '실생활 에서의 역할 찾기'는 자가운전을 다시 시작하면서 더 확대되기 시작해, 집사람 퇴근시간이 되면 일하는 곳으로 형서와 함께 차로 이동해 집사람을 퇴근 시키는 것으로 확대 되어갔다. 불편한 아빠와 지내는 게 재미있지만은 않던 형서는 엄마의 퇴근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는데 "엄마 데리러 가자" 소리에 환호성을 질렀다.
더욱이 의식이 없어 자기도 몰라보던 아빠가 손수 운전해 엄마를 데리러 가는 것에 형서는 대 만족이었다. 물론 그렇게 운전하고 나타난 나를 보고 집사람은 반가와 하기는커녕 불안하다며 화를 먼저 내었다. 교통사고로 불편해진 몸으로 아직도 불편해 입원 치료중인 사람이 혼자서도 아니고 어린 딸까지 태우고 자기를 태우려 왔으니 당연했다.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심하게 반대를 했다. 당연했다.
하지만 계속 현실에서 무기력하게 사는 것을 도저히 용납 할 수 없는 나로서도 물러 설 수 없었다. 그 다음 주 토요일이 되면 여지없이 퇴근시간에 맞춰 나타나는 나와 형서를 보고는 아내도 나중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 복귀해 끊임없는 재활이 지루해질 때마다 외박을 나가 가족과 함께하는 그 시간을 위안 삼으며 토요일 오전까지 재활에 매진했다. 그렇게 나의 "현실에서의 역할찾기"는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갔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역할 찾기는 2007년 생활을 위해 집사람이 형서만 데리고 옮기는 결정도 가능하게 했고, 당시에 손수 운전해 짐을 실고 태워다 주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