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둘러 상경 길에 올랐다. 돌아오는 차속에서 김대중 대통령과의 인연을 되새겨보았다. 그러니까 김대중 대통령과의 첫 만남은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민당 경선에서 김영삼 총무를 따돌리고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돼 박정희와 맞붙은 김대중 후보는 전국 유세 중에 종로 낙원상가 북쪽에 있던 교동국민학교에 들렀다.
"3선 개헌을 획책하면 박정권에 조종이 울릴 것이다"라고 박정희 후보에게 엄중 경고하던 김대중 후보. 국민 여러분이 이번 대선에서 제대로 투표하지 않으면 직선제 대통령 선거는 사라지고 대만처럼 총통제가 될 것이라고 국민을 설득하던 김대중 후보.
평화통일을 주장했던 조봉암씨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 불과 몇 년 전인데 주변 4강이 남북한을 교차 승인하여 남북한 평화를 정착시키자던 김대중 후보.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삼는다는 박정희 후보와 맞붙어 연방제를 주장하던 김대중 후보. 그 중에서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대중경제론'이었다.
재벌과 유착한 개발독재가 당연시 되던 시대에 "재벌을 해체하고 서민경제를 펼치겠다." 돈 없는 사람은 병원에도 못가고 죽어가던 의료보험마저 없던 시대에 "4대 보험을 정착하여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겠다." "여성과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김대중 후보의 경제 공약은 지금은 대부분 실현된 흘러간 정책이지만 당시엔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 마디로 멋있는 정치인이었다.
94만 표차로 석패한 김대중 후보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납치. 수장 위기, 동교동 연금 내내 님은 내 가슴에 살아있는 우상이었다. 서울의 봄도 잠깐, 광주학살에 이어 투옥, 사형선고, 미국 망명. 등등 역경을 헤치며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초심을 잃지 않는 그분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라는 말씀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85년, 미국에서 망명 생활하던 님이 귀국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만사 제쳐놓고 김포공항으로 달려갔다. 손을 뻗으면 잡아 볼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서 그 분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동교동까지 행동을 같이 했다. 이렇게 질긴 인연을 갖고 있는 분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셨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10분의 대통령을 모셨다. 훌륭한 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통한 심정으로 보내드린 것도 마음 아프지만 내 생애 이토록 애통하게 보내드릴 대통령이 다시는 없을 것 같아 가슴 아프다.
2009.08.24 14:58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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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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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와나] 다시는 가슴 아프게 보낼 대통령이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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