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찌뿌등 하던 날씨가 계속되더니 드디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김명곤
박사님, '김대중 선수'를 아시나요?제 지도교수 셔먼 박사는 오래전에 김득구 선수가 미국선수와 혈투를 벌인 끝에 판정패했고, 안타깝게도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 것을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청년시절 헝그리 정신으로 동네 회관에서 권투를 배우기도 했다는 이 양반은 자기 생각에는 경기내용으로 보아 김득구가 진 싸움이 아니었다고 김득구 편을 드는 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특히 김득구의 투지에 찬 얼굴과 눈빛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아이다호 감자바위 출신에다 돼지 농장 머슴 생활을 하며 고학으로 교수에까지 이른 고아출신인 이 양반은 김득구의 투지에 찬 눈빛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 같았습니다.
"에, 닥터 셔먼! 그런데 오늘 제 얘기는 김득구가 아니라 김대중이라는 선수 이야기입니다."
"흠, 김대중 선수라... 잘 안 들어보던 선수인데 미들급인가? 헤비급?"
"(나도 모르게 머리 긁적긁적) 아, 그게 아니고요, 이 양반은 한국의 정치인이랍니다."
"뭐라고... 정치인 권투선수?"
"오, 노노노노 그냥 정치인데요, 김득구보다 더 투지가 넘치고 극적인 혈투를 벌인 선수랍니다."지레 신이 난 저는 "김대중이 묶인 채로 링 위에 올려져 일방적으로 이놈에게 맞고 저놈에게 맞고, 관중도 '빨간 옷 입은 저놈 죽여랴! 소리치고... 그래서 여러 번 쓰러질 듯 또 일어서고 또 일어서고 그랬는데요, 결국 은퇴할 나이에 일생일대의 승리를거두었다!"는 요지의 '김대중 전기'를 장황하게 설명했습니다. 헉, 제가 미국 와서 그때처럼 영어를 길게 잘 한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셔먼 박사는 제 '유창한 영어'에 신기했는지, 아니면 '이 치가 무슨 변명을 늘어 놓는지 좀 더 들어보자'는 생각이었는지 안경 너머로 눈을 꿈뻑거리며 제 얘기를 잘도 들어주었습니다. 아, 그런데 제가 열을 내어 얘기를 하다 예기치 않게 잠시 눈시울을 붉히는 바람에 그가 당황스러워 했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셔먼 박사도 마음이 움직여졌는지 "뭐 나도 김대중이란 이름을 들어보긴 했지만... 그런데 미스터 김, 그래도 논문은 써야겠지? 김대중 선수 때문에 이번엔 지나가지만, 다음엔 안돼!"라고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오랫동안 머무르고 싶었던 그해 겨울, 연례행사로 닥치던 감기도 오지 않았고 하늘을 나는 기분으로 보낸 겨울이었습니다. 그리고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은 이후로도 몇 번 더 닥쳤는데요, 김대중 대통령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훌쩍 북한을 방문했을 때는 정말 숨이 멎는 듯 했습니다.
아, 성경 시편 33편 10절의 말씀이 그때만큼 저의 가슴을 찌르르하고 울린 적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분단은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주신 마지막 시험문제'라며 '이 시험문제를 잘 풀면 우리 민족이 승할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쇠할 것이다'고 했던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이 뇌성처럼 귓전을 때려 왔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의 그 유명한 '금언'도 떠올랐습니다.
"큰 뜻이 아니라 큰 마음이 통일을 이룰 수 있다. 뜻은 큰 만큼 큰 분열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지만 큰 마음은 모든 다른 것을 가슴에 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은 슬픈 만큼 크다."현실주의자 김대중은 미·중·일·러 열강이 역사적으로 지정학적으로 우리 민족의 장래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찍이 터득하고 '4대국이 보장하는 남북 통일론'을 펼치기는 했으나, 이 조차도 우리 민족의 안위는 우리 민족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 위에 세워져 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진행을 믿는 독실한 신앙인인 김대중의 정치 역정을 살펴보면 '사상이 민족에 우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신앙으로, 신념으로 받아들여 실천에 옮기려는 야욕에 차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김대중은 20세기 말에 받아놓은 '하나님의 시험문제'를 50년 동안 풀지 못하고 끙끙대던 우리 민족에게 '그거 간단하다'는 듯 선뜻 해답을 내놓았습니다. 기독교인 장로 이승만이 북한을 '설복할 수 없는 마귀'로 단죄한 이래 대화나 협상을 주장하는 그 어떤 통일론도 '감상적 통일론'으로 치부되었고, 이를 주장하던 김구·김규식·여운형·문익환 등이 '좌빨'로 내몰려 형극의 길을 걷는 것을 보아 왔으면서도 김대중은 '바보야, 문제는 대화야!'하고 줄기차게 외쳤왔던 것입니다. 결국 오랫동안 멸시를 받아 온 '감상적 통일론'은 '더 많은 접촉', '더 많은 대화', '더 많은 협력'을 실행 요체로 하는 햇볕정책이라는 정장을 입고 다시 태어나게 되었고, 6.15 선언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지요.
어쩌면 김대중이 그렇게 오랫동안 추구해 왔던 민주화 운동조차도 민족의 염원인 통일로 가기 위한 '로드 블럭 치우기'였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듯 싶습니다.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는 '사상의 자유시장'을 갖추어야만 통일에 대한 이런 저런 토론이 가능할 것이고, 자신감을 갖고 주변 열강의 협력을 구하고 북과의 대화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이기에 김대중에게 민주화는 평화통일로 가는 길에 반드시 선결되어야 할 과제로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험문제'을 풀기 위해 사력을 다한 김대중어쨌든 김대중은 오래전부터 민족 통일에 대한 슬픈 염원이 있었고, 초기 정치 입문 과정에서 여운형의 '건준'에 참여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큰 마음'은 과거 김구 선생이 민족의 통일을 위해 품었던 것과 같은 '슬픈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민족문제는 머리를 굴려서 푸는 게 아니라 감동으로 풀어야 한다는 감상적 통일론자들의 대표주자였던 김대중의 햇볕정책으로 그해 겨울은 정말 따뜻했고, 그 온기는 임기 마지막 날까지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백성 모두를 따듯하게 했습니다.
김대중은 정녕 20세기에 하나님이 우리민족에게 내리신 시험문제를 풀기 위해 사력을 다한 선수였고, 마침내는 그 정답으로 햇볕정책을 당당하게 내놓았던 것입니다.
아 그런데, 2008년 1월부터 불기 시작한 찬 바람, 김 대통령조차도 "이렇게까지 변하다니, 믿을 수가 없다"고 한탄했다던 그 찬바람…. 폭염의 플로리다에서도 느껴지던 으스스한 냉기를 쐬며 그렇게 김 대통령은 가셨습니다. 비스가 산 꼭대기에서 눈앞에 아스라이 펼쳐진 가나안 땅을 숨막히게 바라만 보다가 숨을 거둔 모세처럼 김 대통령이 가셨습니다.
어느날 우연처럼 다가온 노 대통령의 죽음, 그리고 이어진 김 대통령의 죽음 앞에서 느끼는 상실감을 어찌해야 할까요. 얼마나 하늘이 원망스러웠으면 소설가 이외수는 "이제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버릴 일만 남았다"고 외마디를 내질렀을까요.
저 또한 "하나님, 그래도 우리 민족에게 존경할 만한 인물 하나쯤은 남겨두셔야지요, 이거 정말 너무하시는거 아닙니까" 그런 원망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