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무후사로 자리를 옮긴 삼의묘에는 언제나 향냄새가 진동한다.
모종혁
무후사는 남북을 가로 질러 대문과 이(二)문, 전각, 유비전, 제갈량전 등 육열식 배열구조로 되어 있다. 이는 양조사합의 건축구조로 청나라 때 유행했었다. 전각은 갈산식 지붕에 처마에 종고(鐘鼓)를 달고 좌우 회랑에 진귀한 금수(禽獸)가 석조로 장식되어 있다. 무후사는 역대 문인들이 즐겨 찾는 명소였다. 760년 안사의 난을 피해 청두에 정착한 시성 두보도 무후사를 자주 찾았다. 그는 제갈량을 기리며 주옥같은 시 한 편을 남겼다.
세 번 다시 찾은 번거로운 일도 천하 위한 계책이요, (三顧頻煩天下計)
두 임금을 섬겨 나라를 구하려는 노신의 마음을 보여주셨네. (兩朝開濟老臣心)
전쟁에 나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 (出師未捷身先死)
후세의 영웅들로 하여금 눈물을 옷깃에 적시게 하는구나. (長使英雄淚滿襟)
- '촉상'(蜀相) 중에서
제갈량전 뒤에는 삼의묘(三義廟)가 있다. 삼의묘는 유비, 관우, 장비를 추모하는 사당이다. 삼의묘 내에는 유비, 관우, 장비의 좌상이 함께 모셔져 있다. 묘당 마당에는 도원결의부터 유비의 죽음까지 삼형제와 관련된 다양한 고사를 벽화로 전시하여 보는 이를 즐겁게 한다.
본래 삼의묘는 청나라 강희제 때 티두제(提督街)에 조성됐었다.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의 파괴로 폐허가 된 것을 1997년 무후사 내로 이전하여 복원했다. 유비전이나 제갈량전과 달리 절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어 있어 언제나 관광객이 절하면서 꼽은 향냄새로 진동한다. 아쉬운 점은 최근에 만들어진 삼형제의 좌상이 유비전과 제갈량전 내에 있는 찰흙상보다 예술적 가치가 훨씬 떨어진다는 것이다. 얼굴 표정이나 인물 묘사가 단조롭고 조악하여 청나라 때 만들어진 찰흙상과는 대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