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80년 신군부로부터 내란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사형수로 복역하기도 했다.
김대중도서관
군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장 큰 비토세력이었다.
태생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군부에게 김 전 대통령은 언제나 '사상이 의심스러운' 정치인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군부의 만남은 악연으로 시작되었다.
5·16 쿠데타, 김대중과 군부의 악연의 시작국회의원 선거에서 연거푸 세 차례 고배를 마시고, 1961년 5월 14일 4번째로 도전한 제5대 민의원 보궐선거(강원도 인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으나, 이틀만에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미처 의원선서도 하지 못한 그는 민주당 간부라는 이유로 쿠데타군에 의해 연행되어 2개월간 옥고까지 치른다.
"천신만고 끝에 국회의원이 됐는데, 3일만에 자격을 상실했다. 나는 운명의 얄궂음을 통탄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85년 발간된 저서 '행동하는 양심으로'에서 김 전 대통령은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야당 정치인 김대중은 꼭 10년 뒤 벌어진 대통령 선거에서 군부와 다시 부딪힌다. 1970년 11월 19일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은 "현 향토예비군은 이중병역의 의무를 강요한 위헌적인 것이며, 경찰의 보조기관으로 전락되고 지휘계통이 국방장관과 내무장관에 이중으로 되어 있어 정치적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고 생업에 지장을 초래할 뿐 아니라 민폐를 조성, 부정부패를 가져올 뿐"이라며 "예비군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공약을 한다.
쿠데타로 집권해 권력의 기반을 공고화해가던 군부에게 김대중 후보의 이런 소신은 아주 위험한 것이었다. 김대중 후보는 "국군은 특정 정당이나 개인의 사병이 아니며… 군이 정치에 자주 개입하면 정국의 안정과 민주발전을 해친다"며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했지만, 군부와 여당은 "군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지도자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며 김대중 불가론을 유포했다.
"사상이 못미더운 DJ, 집권해선 안 돼"
지난 2006년 별세한 강창성 전 의원(전 국군보안사령관, 민주당 14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총재 권한대행)은 생전에 <동아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71년 대선 당시 군부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군부가 DJ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DJ의 '사상'에 대한 못미더움이고, 또 하나는 5·16의 연장선상에 있던 당시 군 주체세력들이 DJ가 집권할 경우 보복 가능성 등을 우려했다는 점이다."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김대중 후보는 70년대 내내 투옥과 망명, 연금 상태에서 지내야 했다. 유신으로 영구집권의 길을 걸어가던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고 잠시 '서울의 봄'이 찾아왔지만, 군부는 여전히 그를 불신했다. 김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씨는 자서전 '동행'에서 당시의 시련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정국이 요동치는 가운데 우린 여전히 연금 중이었다. 불안한 가운데 사태 추이를 지켜보고 있던 중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참모총장이 11월 28일 언론계 간부를 육군본부로 초청해 말한 내용이 전해졌다. "김대중은 사상이 좋지 않다. 그는 용공이다. 최고사령관은 고사하고 일개 소위도 할 수 없다" 이는 김대중 비토 세력인 정치군인들의 일관된 태도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군인 집단이 모든 권력을 거머쥔 25년 동안 그가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남은 것이 오히려 기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이 발언을 하고 불과 2주 뒤 정승화 참모총장은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이 일으킨 12·12 쿠데타로 체포된다. 하지만 신군부라고 그에 대한 인식이 다른 것은 아니었다. 독재자의 비호를 받으며 기득권 세력으로 성장해온 신군부 세력에게 "사상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정치인"(전두환 보안사령관 발언) 김대중은 제거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잠시 연금에서 해제되어 자유의 몸이 된 그는 "군의 정치적 중립은 절대로 유지 돼야 한다. 본인은 앞으로 정치개입이라는 부당한 사태를 감히 저지를 군인이 있을 것으로 믿지 않는다. 국민이 절대로 원치 않기 때문이다"(80년 4월11일 대전연설)라고 군에 대한 신뢰를 역설했지만, 그 믿음의 결과는 참담했다.
신군부 세력은 80년 5월17일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함께 광주민주화 항쟁을 총칼로 탄압했고, 계엄군에 연행된 그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에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는다. 국내외적으로 대대적인 구명운동이 벌어진 결과 군사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데 이어 82년 12월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열어 활동하다 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귀국한다.
87년 6월 항쟁으로 군사정권이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였을 때도 군부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박희도 육군참모총장은 "김대중씨의 대통령 출마를 반대한다"는 공개선언을 했고, 모 장성은 사석에서 "김대중이 대통령 된다면 수류탄을 들고 뛰어 들겠다"는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 정치적 라이벌인 김영삼은 이 같은 분위기에 편승해 '군이 원치 않는 사람은 군 통수권자가 될 수 없다'는 논리로 대통령 후보 사퇴를 압박했다.
국민의 정부 햇볕정책, 군 출신 보수집단과 충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