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모으고 앉았다 일어서기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한 '다리 모으고 앉았다 일어서기'는 기구없이 틈새시간을 활용하기도 좋고 나의 가장 큰 장애인 밸런스와 코디기능 향상에 제격이었다
서치식
어렵게 시작한 일터에서 부족한 나를 느끼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사고 후 3년이 접어들며 어설프지만 그런 대로 일상적인 생활이 가능해져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말 그대로의 일상에 복귀할 수 있었다.
선샤인(
www.sun4in.com)이란 인터넷 매체에서 2008년 중반부터 편집기자로 근무를 하기 시작했다. 사고 전 지방지의 업무국에 10여년 다니던 시절에 친해져 교류가 많아 형제처럼 지내던 형님이 그곳의 대표를 맡으며 내게 기회를 준 것이다.
사고 후 3년여를 재활이 직업인 것처럼 생활하던 내게 무언가 할 일이 주어졌다는 사실이 나를 설레게 했다. 외근을 하는 취재보다는 내근을 주로 하며 편집을 하는 업무로 몸이 좀 불편해도 업무에 큰 지장은 없었다.
근무 초기 그때까지 다니던 통원치료를 조절하며 요령껏 다녔지만 개인별로 정해진 시간에 따라 이루어지는 재활병원의 특성으로 두 가지를 병행하기란 버거웠다. 그래서 예전에 하던 헬스를 이용한 재활을 다시금 하기로 하고, 퇴근 후 무조건 헬스로 가 2시간씩 땀 흘리며 재활을 하기 시작해 꾸준히 했다.
그렇게 일과 재활을 병행해 완전한 재활을 꿈꾸며 열심히 해도 사람들 앞에 서면 어눌한 말투로 인해 일단 위축되고 자신 있게 나서질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편집기자 일을 한다 해도 외부로 나가 사람을 만나야 할 일도 있었으며, 그럴 때마다 내게 일을 안 맡기려 했고 나 자신도 그런 일을 자꾸 피해하는 게 점차 당연시 되어갔다.
편집기자의 주요한 업무 중에 하나가 각 기관과 출입처에서 이메일을 통해 매일 들어오는 보도자료를 재가공해 자사의 기사로 편집해 게재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용에 따라 전화로 보충취재를 해야 할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아직은 어눌한 말투로 인해 미리 질문내용을 정리하고 입으로 연습하고 통화를 하거나 양이 많거나 애매한 경우엔 동료에게 부탁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따라 동료들도 자기 업무로 모두들 바쁘고 나도 일이 많아 미리 정리도 못한 상태에서 보도자료를 보며 전화로 어느 기관의 홍보담당자에게 보충취재를 시작했다. 내 업무에 쫓겨 어눌한 말씨에 특별히 신경 쓰지 않고 통화하다 보니 내 말씨가 더 어눌했나보다. 그 홍보담당자가 주저하며 "아무리 우리를 홍보 해주는 기자의 신분이라도 말씀이 너무 하시지 않습니까? 줄곧 반말을 하시니 심히 불쾌 합니다"하는 게 아닌가? 그때서야 아뿔싸! 하고 사실은, 제가 아직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본의 아니게 말이 반말처럼 들렸나 보다고 사과했지만 소용없었다.
흔히 교통사고 하면 겉으로 드러나는 부상정도만 생각하게 되고 말이 어눌할 정도의 부상은 접해 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리라. 결국 그 기관을 출입하는 기자가 나중에 그 담당자 에게 나에 관해 설명하고서야 오해가 풀렸지만, 그 일은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일을 계기로 다시금 내 자신을 돌아보았다. 내 본심과 상관없이 내 말을 듣는 사람들이 불편을 겪는다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가능할 수 있는가? 또 낯선 사람을 만나는 일에 내 자신이 위축되어 뒤로 빼는 상황이다 보니 회사에서도 그런 일에서 날 제외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그런 문제들을 애써 모른 체 하고 계속 그렇게 생활하면 난 영원히 많이 불편하고 위축된 초라한 장애자로 살 수밖에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사회복귀가 더 늦어지더라도 충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렇게 혼자 고민에 쌓여 있던 어느 날 정부의 보도자료를 보다가 눈에 번쩍 띄는 자료를 발견했다. 공무원 시험에 나이제한을 두는 것은 위헌이란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2009년부터 공무원 시험에 나이제한이 폐지된다는 내용이었다. 이 자료를 보는 순간 "이거다! 사고로 인한 머리부상에서 오는 열등감을 극복하고, 아직은 내 힘으로 무언가 성취 할 수 있다는 것을 주변에도 보여주고 스스로의 자신감을 회복하기 위해선 도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2급 뇌병변 장애 판정을 받은 내가 체계적인 학습을 해야 하고 더욱이 경쟁이 치열한 시험을 과연 합격하겠나? 하는 망설임으로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내가 선샤인뉴스에서 일하도록 기회를 준 대표에게 어렵게 기회를 보아 상의를 해도 "네가 열심히 공부해 설령 합격한다고 치자. 그때 받을 수 있는 급여가 지금보다 월등히 많은 것도 아닌데 여기서 일하는 게 더 안전한 거 아니냐?"는 대답만 돌아왔다.
처음 자료를 접하고 그렇게 두 달여를 망설이다 보니 어느새 2008년 12월이었다. 혼자 수험서를 몰래 사서 봐도 영 자신이 서지 않았다.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가 않았고, 집사람에게 상의해도 '자기에게 어렵게 주어진 선샤인 일을 불확실한 시험 준비를 위해 포기하는 건 너무 위험하다'고 말렸다. 부모님과 형들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