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한의시집해방기 문학의 빛나는 성과로 꼽히는 이 시집은 한때 간첩 조작사건의 불쏘시개로 쓰였다.
미래사
'스키와 코프의 추억(?)'은 냉전시대 시국사건 피해자들이 겪은, 웃지 못할 코미디다. 오송회 교사들이 기억하는 '코프와 스키'는 차라리 장난 수준에 속한다. <병든 서울>이라는 어느 시집 한 권은 그들에게 '코프와 스키'와는 비교도 안 될 상처를 남겼다.
82년 7월 누군가 군산 시외버스에 시집 한 권을 놓고 내렸다. 버스 안내양은 필사본으로 된 그 시집을 군산경찰서에 갖다 줬는데, 경찰은 시집을 뒤적거리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인민의 공통된 행복'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나라' 같은 시구에서였다. 인민. 북괴가 애용하는 '인민!' 그들은 부푼 가슴으로 내사에 착수했다. 알아보니 그 시는 '월북시인' 오장환의 작품이었다. 게다가 월북시인이라니! 그들의 눈에 '월북'은 이미 '월척'으로 바뀌었으리라.
전북대 어느 교수에게 그 시집을 보여주었더니 '지식인 고정간첩이 복사해 뿌린 것 같다'고 짐짓 심각한 진단을 내렸다. 드디어 경찰의 월척 낚기가 시작되었다. 석 달에 걸친 끈질긴 추적 끝에 82년 11월 경찰들은 군산제일고 교사인 이광웅, 박정석씨 등을 잡아들였다. 그 시집 필사본의 뒷표지가 군산제일고의 상장 종이였던 것이다.
월북작가의 작품을 소지하였다며 '이적표현물 소지죄'를 빌미로, 고문을 자행하고 자술서 쓰기를 강요했다. 평소 사회비판적 의식을 갖고 있던 젊은 교사들을 국보법 위반으로 엮으려고 맘먹으면 엮을 것이 천지였다. 봄날 뒷산에서 4.19를 추모했다, 술집에서 북한체제 이야기를 했다, 5.18 이야기를 했다 등등. 오송회 사건은 시집 <병든 서울>을 '결정적 단서'로 삼아 시작됐다.
그러나 시인 오장환(1918~1951)은 해방기 문단에서 빛나는 문학적 성취를 이룬 대표적 모더니즘 시인으로 꼽힌다. 특히 그의 시 '병든 서울'은 해방 직후 우리 현실을 가장 사실적으로 보여준다고 평가받는다. 그 시는 '해방기념조선문학상(1946년 조선문학가동맹이 제정)' 최종심에 오른 작품이기도 했다. 시 속에 등장한 단어 '인민'은 해방 후 이 땅이 남북으로 대치되기 전 애용되던 말이기도 했다. 당대의 사실로 보아도 북한만의 언어는 아니었던 것이다.
오장환의 시집들은 87년 무렵부터 판금조치 목록에서 풀려 시중에 판매되기 시작했다. 오송회 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5년 후였다. 한발 더 나아가, 오 시인의 고향인 충북 보은의 보은문화원은 지난 1996년부터 매년 오장환문학제를 열고 있다. 보석 같은 문인 하나가 한 지역에 얼마나 큰 문화자원이 되는지를 잘 포착한 지방자치 시대의 생리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많은 사람들은 그의 시를 읽고 낭송한다. 천재로 불린 오 시인의 시를 음미하면서, 한때 그의 시집이 간첩을 만드는 불쏘시개로 악용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드물다.
사막의 바람이 순식간에 모래를 날린다. 그들을 둘러싼 사건의 전말 역시 겨우 한 세대만큼의 세월도 안 되어 드러나 버렸다. 권력의 잔인한 칼부림에 자신의 젊음과 가족의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겼는데, 어디다 하소연해야 할지 그들은 어지럽기만 하다. 한국사회는 어제를 허물어낸 잔해 위에 오늘을 지어 올리느라 바빴고, 그 사이 사람들은 독재권력의 잔혹사를 잊었고, 김연아와 림스키 코르사코프에 열광하고, 오장환의 시집을 탐독한다.
반공을 국시로 삼은 이 나라에서 '간첩죄'는 강력한 것이어서, 아무리 인정 많은 이웃이라도 간첩죄를 뒤집어쓴 그들에겐 측은지심을 느끼지 않았다. 가까이 하면 자신도 간첩죄를 쓸지 모르니 서둘러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동정하지 않아도 미안스럽지 않음'이 오송회 교사들을 대하는 이웃들의 태도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신호가 닿지 않은 진공 같은 날들 속에서 오늘을 맞았다.
누구라도 자유롭게 소위 '동구권'으로 해외여행도 가는 마당에, 오송회 교사들은 오래도록 다른 시공간을 살도록 강요받았다. 94년엔가, 박정석씨가 동료 학원강사들과 함께 단체로 해외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나중에 일행 중 하나가 박씨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선배님. 실은 우리 모두 여행 다녀온 후 경찰서 불려가서 조사 받았어요. 박 선배님 언행에 특이점이 없었는지 묻더라고요."
어지러운 세월에 먹먹하기는 이들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복직한 어느 교사는 87년 6월 항쟁을 맞아 거리로 뛰어나갔다. 대학생이 된 제자가 그의 옆을 함께 뛰면서 멋쩍게 웃었다. "어릴 땐 주위에서 이야기를 듣고 선생님이 간첩인 줄로 믿었고, 만나면 돌로 찍어버리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런데 오늘 제가 선생님과 함께 시위를 하고 있네요."
사건 당시 법정에 끌려가 거짓 진술을 강요받은 제자들도 있었다. 선생님께 빌렸던 시집 <병든 서울>을 버스에 놓고 내렸던 제자는 오래도록 멍든 가슴으로 살아왔다. 어느 제자는 그의 스승처럼 경찰서로 끌려갔다. 수사관들의 발길질과 구타는 선생과 학생을 구별하지 않았고, 멍투성이가 된 고등학생은 법정에서 자기 스승을 '고발'해야 했다. 그 학생은 2008년 11월 재심 재판정에 다시 증인으로 섰다. "그 당시 워낙 겁에 질려 검사가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하며 눈물을 흘렸다. 청춘을 죄책감에 내어준 채 중년이 돼버린 제자의 등을 스승은 말없이 다독여주었다.
6. 2008년 재심 받던 법정에 울려 퍼진 판사의 시- 다시 '법원'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