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대치동 타워팰리스 등 고층 아파트 전경.
선대식
외환위기 이전 우리 사회가 고도 성장을 하던 시절 화이트 칼라 중산층은 상당히 안정된 계층이었다. 대단한 부자로 사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사회와 체제에 순응하면 현실의 안정은 보장 받을 수 있으리란 믿음이 존재했다.
그런 이유로 그 계층은 비교적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띠었고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면서 살았다. 중산층의 보수적인 성향은 정치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보호를 받았다. 물론 그 과정이 중산층 국민을 위하는 진정성이 전제된 것은 아니었다. 국가 주도 산업화 과정에서 중간 관리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중산층의 사회진출이 지금보다 원활했고 기업 또한 평생직장의 신뢰를 제공했다.
이렇게 중산층이 안정적인 지위와 경제적 기반을 유지할 수 있는 분위기는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180도 달라졌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수익성 및 비용절감 추구, 주주 이익을 위한 주가 유지가 기업들의 지상과제가 되었다. 기업의 그러한 변화는 중산층에게 고용불안과 해고 및 실직 위기로 되돌아왔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허리를 이루는 중산층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기반을 보호받지 못하는 불안한 계층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냉엄한 현실을 정작 중산층이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전히 체제 순응적이고 보수적 정치 성향을 유지한다. 사례의 대기업 직장인은 대선 당시 개혁을 이야기하며 경제를 정체시키는 사람보다는 부도덕하더라도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더 낫다고 여겼다고 한다.
고위 공직자들의 부동산 투기 의혹을 접하면 상대적 박탈감에 화가 나기도 하지만 능력있는 사람이라는 부러움을 가졌다. 노조가 과격한 시위를 하는 모습은 국가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못난 짓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고 앞으로 부동산 가격은 계속 오를 것이란 믿음을 갖고 있다. 경쟁은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며 경쟁에서 도태된 사람이 빈곤계층으로 전락하는 것은 안타깝기도 하지만 경제 성장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긴다. 사회적 약자층에게 구제 제도를 만드는 것은 세금 낭비이며 그런 제도에 의존해 생활비를 지원받는 사람은 도덕적 해이에 빠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보수적인 가치관은 사실상 중산층이 사회의 기득권을 일부라도 보장받던 시절에는 옳고 그름을 떠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산층의 지위가 변하고 있는 현재 스스로에게 화살을 돌리는 위험한 가치관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세상은 중산층에게 안정된 지위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명문대를 나와 조직에서 안정적인 줄을 갖고 있건, 아첨으로 조기 승진한 사람이건, 오로지 일만 해왔던 사람이건, 언제 해고 당할지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집에 껴있는 부채를 다 상환하기도 전에, 아이들이 이제 막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상황에서 하루 아침에 조기 퇴직 통보를 받게 될 것이란 공포심을 안고 사는 것이 모든 중산층의 현실이다. 대신에 자기 계발이나 승진 같은 것에 신경 쓴 사람들보다 일찌감치 부동산 투자에 나섰던 사람들이 스타로 떠오른다.
자기보다 성적이나 리더십 등에서 뒤처졌던 동창이 강남의 60평형대 주상복합 아파트에 산다는 소문을 듣는다. 최선을 다해 살아온 노력들이 보상받기는커녕 실력없이 운만 좋은 사람들에게 밀려나는 상실감이 든다. 그렇지만 결국 운을 좇는 대열에 끼지 않으면 밀려날 것이란 공포심을 안고 있기 때문에 뒤늦게 투기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노동시장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 것이란 공포심과 자신의 십여년간의 노동가치보다 운좋은 주택 매매 차익이 더 크다는 상실감을 경험한 중산층은 노동윤리보다는 지독한 머니 게임에서 승자가 되는 길을 이기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기적인 선택이 자산 소득을 실현하기는커녕 매월 빚 갚는 아슬아슬한 생활을 만들어 이전보다 더 극단적인 경제적 위험에 노출되는 현실을 만들었다. 주식과 펀드로 자산 소득이 아닌 자산 손실을 반복하게 만들고 있고 엄청난 빚을 내서 투자한 부동산은 손에 쥔 현찰이 아닌 장부상 차익으로만 존재할 뿐 매월 빚 갚는 생활만을 만들었다.
사회의 근원적인 변화보다는 지독한 경쟁사회에서 '너의 손실이 나의 수익이 되는' 이기적 머니게임의 동참이 중산층에게 다시 화살로 돌아오고 있다.
공포는 독재와 마케팅의 가장 좋은 재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