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한 기원천왕문 안에서 사천왕 상에게 허리숙여 절을 올리는 중생
이성한
얼마간 비탈길을 지나니 실질적인 절집의 대문이라 할 천왕문이 버티고 있었다. 돌계단에 올라 천왕문의 안쪽 그늘에 서서 좌우에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악귀를 밟아 제압하고 있는 4명의 사천왕상을 만나볼 수 있었다. 불법을 수호하는 4명의 수호신이 지키고 있는 천왕문(혹은 금강문, 인왕문)은 사악한 세력과 악귀의 범접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다르게 보면, 사뭇 해학적이면서도 유쾌한 웃음을 짓게 하고 있으니 강온의 양면성이 엿보이는 조각을 새긴 목수의 '외강내유'의 미학적 관점이 반영된 작품이라 할 만 했다.
천왕문 안에서 좌우의 사천왕에게 합장한 손으로 연신 머리와 허리를 숙여 절을 하고 있는 지긋한 아주머니를 보았다. 몸짓으로만 보아도 간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정성스런 인사였다. 걸음을 멈추고 어두운 그늘이 자욱한 천왕문 안에서 한 폭의 그림처럼 고개 숙인 겸손한 중생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볼 수 있었다. 합장한 아주머니의 공손한 인사는 사천왕에게 이렇게 말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가정의 평화를 해치는 사악한 악귀가 찾아오지 못하도록 보호하여 주소서""불법을 수호하는 신성한 힘으로 내 안에 꿈틀대는 이기심과 욕심을 모두 버리게 하소서""힘들고 고통 받는 중생들에게 굳센 용기와 희망이 피어나도록 하소서" 흔들리는 사람의 마음에 먼지 같은 번뇌가 쌓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물욕과 갈등, 반목이 켜켜이 기승을 부릴 때면 절집에 찾아와 마음을 다스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왕문을 통과하여 부석사 경내로 들어섰다. 발 앞에 석축 돌계단이 무엇인가 의미심장한 규칙과 불법에 따라 놓여져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놓여져 있다는 것보다는 쌓여 있었고, 절집을 찾는 중생들을 위해 매우 질서 있게 디딤돌이 되어 주고 있었다. 제멋대로 생긴 크고 작은 자연석들이 서로의 간격을 메우며 이를 맞추어 쌓여진 조화로움은 그 자체로도 큰 깨달음을 주었다.
큰 돌은 기꺼이 아래로 놓여 기초를 이루며 위를 받쳤고, 중간 돌은 그 위에 놓여져 석축의 상단과 기단을 연결해주는 물리적 힘의 중추가 되고 있었다. 크기가 작은 돌들은 큰 돌과 중간 돌들의 틈새 사이로 몸을 파고들어 촘촘하고 빈틈없이 공간을 채웠다. 그리고 그보다 더 작은 공간은 흙과 모래가 스며들어 한 치의 허술함이 없도록 자신을 헌신했다. 크고 작은 갖가지 모양의 돌과 흙과 모래는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실존적 가치와 의미에 대한 희열을 조화롭게 누리고 있는 것 같았다.
석축과 돌계단은 나를 기꺼이 내려놓아 나와 남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 또 그것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것,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조화로움을 실현하는 것, 아마도 이런 것들을 몸소 보여주어 가르침을 주고 있는 상생적(相生的) 건축미학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사시사철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밟으면서 오르고 내리는 이 석축과 돌계단을 올라서며 기분 좋은 상상을 하고, 뿌듯한 교훈을 얻을 수 있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