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당국의 사면으로 풀려난 미국 여기자 로라 링(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과 유나 리(왼쪽에서 세번째)가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부근 밥호프 공항에 도착해 가족을 만났다.
연합뉴스
이에 반해 미국 백악관 측은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문이 개인적이고 인도적인 것이라며 의미를 축소하고 있다. 또 북한 측 보도와 달리 클린턴이 오바마 대통령의 메시지를 갖고 가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기자들의 질문이 거듭되자 깁스 백악관 대변인은 아예 "전직 대통령의 개인적인 방북에 대해 논평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이 때문에 조야의 시각은 클린턴의 방북으로 북미관계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 수 있다는 낙관론과 함께 개인 신분으로 북한을 방문한 만큼 근원적인 처방이 될 수 없다는 비관론이 팽팽하게 맞서는 분위기다.
일단 한미 정부 당국자들은 클린턴의 방북이 지난 3월 이후 북한에 억류되어온 미국 여기자 2명의 석방을 위한 '개인적 방북'임을 강조하고 있다. 일면 타당한 객관적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외교적 사안에서 정부 당국이 취할 수밖에 없는 당위론이기도 하다.
15년 전인 1994년 클린턴 행정부 당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방북할 때도 한미 정부 당국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핵시설에 대한 군사적 제재 상황까지 간 상황에서 정부와 조율되지 않은 카터의 개인적 방북에 마뜩잖아 했다. 1차 북핵위기 당시 북미 핵협상 대표였던 로버트 갈루치 전 미 국무부차관보는 자신의 공저 <벼랑끝 북핵협상>(The First North Korean Nuclear Crisis: Going Critical)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카터 방북에 대해 앨 고어 당시 부통령은 찬성한 반면,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반대했고 앤서니 레이크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썩 내키지 않으면서도 김일성을 직접 면담, 미국의 관계 개선 의지 등 진의를 분명히 전달해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며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 소식을 듣자 클린턴 대통령에 전화를 걸어 '(대북 제재에 대한) 국제적 지지가 증가하고 있는 판국에 카터가 방북하는 것은 실수'라고 지적하기도 했으나 방북이 결정되자 카터 전 대통령을 서울로 초청, 한국의 입장을 전달하기도 했다."카터의 선물 보따리와 클린턴의 선물 보따리김영삼 대통령은 카터의 방북 물꼬를 튼 것이 당시 야인이었던 김대중(DJ)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이라는 점에서 마뜩잖아 했다. DJ는 94년 5월 당시 아태평화재단 이사장 자격으로 미국 내셔널프레스클럽(NPC) 연설에 나서 '주고받는 협상'과 '일괄타결',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을 제안했고, 이 연설은 그해 NPC의 '베스트 스피치'로 선정된 바 있다.
그러나 카터 전 대통령은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과 두 차례 회담을 통해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잔류의사 확인을 통해 핵위기 해결의 실마리를 열었으며 남한에는 '조건없는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뜻밖의 선물 보따리를 갖고 왔다. 비록 김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정상회담이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조건 없는 남북정상회담 약속은 제재국면을 대화국면으로 전환시켰다.
15년 전과 비교해 이번 방북은 클린턴이 현직 대통령 시절에도 방북을 원했던 전향적 평화주의자인 데다가 정부와 사전 조율된 흔적이 역력하고, 특히 부인이 국무장관이라는 점에서 더 극적인 변화의 계기가 조성될 수 있다. 그의 방북을 두고 "북-미 간 빅딜 시작의 단초"(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라거나 "국면 전환의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쌍방의 의지가 담겨 있다"(임동원)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클린턴이 오바마 정권인수팀장을 지낸 포데스타 전 비서실장을 대동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특히 오바마 정권이 현재 북한 핵문제에 대한 '포괄적 패키지'를 모색하고 있어 클린턴 방북 및 여기자 석방을 계기로 북미대화의 계기가 마련될 가능성은 커 보인다.
미국 측의 '포괄적 패키지' 구상은 북한이 완전하고 회복 불가능한 비핵화를 실행하는 시점에서 대가를 일괄적으로 결정한다는 구상으로, 그 대가에는 광범위한 경제 지원과 북미 국교정상화도 포함된다. 따라서 여기자 석방을 위해 북한 측이 먼저 지목했던 것으로 보이는 클린턴의 방북을 미국 정부가 승인함으로써 북미 양국은 '포괄적 패키지'의 진정성을 탐색할 기회를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한국 정부의 자세다2000년 10월 북미 공동 코뮤니케 채택은 북미 수교를 시간문제로 인식시켰다.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약속으로 한반도에 봄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이 취임해 북을 '악의 축'으로 몰아붙이면서 붕괴정책을 표면화하자 관계는 급속히 얼어붙었다. 북한은 NPT 탈퇴와 핵 동결 해제로 저항했고, 미국은 대북 중유공급 중단, 경수로 사업 중단으로 맞서 대립을 첨예화시켰다.
그래서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인가. 김정일의 여기자 사면에 대한 오바마의 선물과 클린턴의 방북 선물 보따리는 시간이 좀 더 흘러야 공개될 것이다. 그러나 현직 대통령 시절에 제1차 북핵 위기를 직접 다룬 클린턴의 방북은 그를 승계한 오바마 정권이 북한이 끊임없이 주장한 2000년 북-미 공동 코뮈니케를 새로운 북미협상의 출발점으로 삼을 것을 사실상 약속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김정일의 공식 특사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한 조명록이 클린턴 대통령과 만나서 합의한 이 '북미 공동코뮈니케'에는 북미 간 관계 전면 개선, 한반도 전쟁종식(평화협정), 한반도 비핵화, 경제협조와 교류협력 확대 등 대북 강경책을 고수하는 이명박 정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포괄적 패키지'가 다 들어 있다.
문제는 북한이 대화의 장에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전략을 고수하는 한국 정부의 자세다. 오바마 정부가 제시한 '포괄적 패키지'는 이미 15년 전에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에 제시한 '포괄적 접근방안'이나 '일괄타결안'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클린턴 대통령과의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워싱턴을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은 미국이 제안한 포괄적 접근방안을 반대했다. 갈루치는 위의 같은 책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블레어하우스(영빈관)에서 열띤 논쟁 끝에 결론이 내려졌다. 한승주 외무장관은 대미 협의에서 합의된 '포괄적 접근' 방식을 설명했으나 유종하 유엔대사는 북한에 대한 당근, 특히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 같은 큰 당근은 남북한 상호사찰에 연계시켜야 된다며 대북 강경책을 주장했으며 박관용 비서실장도 그를 지지했다. 박 실장은 김영삼 대통령의 방미가 국내 정치에 미칠 영향에만 쏠려 있었다.…(중략)… 김영삼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과의 단독회담에서 미국이 한국에 통보한 일괄타결안을 포함한 대북 포괄적 접근방식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혔는데 블레어하우스에서 유종하 대사 등이 내세운 강경 접근법을 설명했다."한반도 평화의 계기를 외면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