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에서 독립애국지사와 의사를 생각하다!

백범 김구선생과 이봉창, 윤봉길 의사

등록 2009.08.03 09:50수정 2009.08.03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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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에 상해로 문학기행을 갔다. 임시정부와 홍구(虹口)공원에서 순국하신 애국지사와 많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지사들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내국에서 독립투쟁이 쉽지 않아 해외로 망명을 했다. 망명지 중국의 상해에 역사적인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웠다.


1919년 4월19일, 상해임시정부청사에 모인 30여분의 독립 애국지사들이 일제가 조국을 침탈하여 정한 대한제국이란 국호의 변경을 논의했다. '조선'이나 '고려' 등 여러 안들이 제안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大韓民國)을 다수결로 정하였다.

1948년7월 제헌국회에서, '대한민국민주공화국' 헌법이 탄생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부터 현재까지 존재한 대한민국 국호가 현행 헌법에도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 임시정부의 정통성과 건국기준에 대한 논란이 있어 매우 안타까웠다.

상해를 가면 당연히 찾는 임시정부청사, 중국은 6.25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적대국이었으나 오래전 수교하여 한중간에 활발한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 그들은 신사회주의 개방체제로 전환하여 빠르게 발전하는 모습이었다. 중국 경제의 상징도시인 상해는 고층빌딩숲과 선진국을 능가하는 경제활동에 과연 이 나라가 사회주의 국가인지 의문이었다.

상해는 내년에 있을 세계박람회 개최준비를 위해 분주했다. 지지난해 북경을 찾았을 때는 지난해 올림픽 개최준비를 위한 도시미화 작업이 분주하더니, 상해도 북경처럼 곳곳을 파헤쳐 공사를 하고 있었다. 임시정부청사도 재건축대상이었다는데 다행이 보존하기로 양국이 합의했다고 한다.

청사는 협소한 집무실과 회의실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조국을 떠나 해외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지사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에 절로 머리 숙여졌다. 백범선생이 국내에서 상해로 망명한 1926년 이후, 경무국장 국무령 직에 있을 때, 한인애국단 결사대를 조직해 활동한 자료와 생생한 모습을 비디오를 통해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다.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독립공채를 발행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세계에 홍보하는 등 활발한 운동을 폈다. 이봉창의사가 일황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지만, 윤봉길의사가 홍구공원에서 거사가 완벽하게 성공하여 아시아는 물론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로 인해 중국인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 행보에 찬사를 보내고 성금이 답지했다.

우리나라가 일제침략으로부터 36년 만에 광복을 맞이했으나 해방은 곧 분단이 되고 말았다. 거슬러 보면 1905년 을사늑약 이전부터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청일전쟁과 중일전쟁 그리고 러일전쟁에서 징검다리가 되곤 했다. 이때에 외교적으로 보다 더 당당하고 지혜가 필요했지만 그것은 약한 국력과 지도자의 한계였다.


100년 전, 조선은 일제 메이지 유신정부의 정한론에서부터 끈질긴 침략이 계속되었다. 유신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미우라와 침략대부인 야마카타를 빼놓을 수가 없다. 이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주도세력들이다. 동아시아 초원에서 징기스칸이 지축을 흔들었다면, 왜구들은 아시아를 천년을 두고 괴롭혔다. 그런데 우리는 변화하는 정세에 시야가 어둡기만 했었다.

한일합방에 분개한 독립애국지사들이 행동했다. 1909.10.26 대한의 안중근 순국의사가 동양평화를 해치는 이토 히로부미를 대련에서 처단하는 쾌거를 이뤘다. 1919년 고종황제 장례식에 3.1운동이 일어났고 1928년 이동녕 이시영 김구 등 한국독립당이 창당했다. 1932년 도쿄와 같은 해 홍구공원에서 의거로 서서히 몰락한 일제였다. 1945년8월15일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연합군국에 항복하였다.

이렇듯 대한민국인은 일제침략과 제국주의에 맞서 수많은 희생과 고통을 이겨냈다. 오직 독립을 위한 의거에는 백범선생이 정점이었다. 1년여 동안의 치밀한 폭판 제조와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실행에 옮긴 의사들이다. 특히 나에게 형뻘 항렬인 매헌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 폭탄거사는 대한인의 기개였다. 매헌은 사랑하는 처자식을 두고 순국하심은 실로 하늘이 내린 의인이 아니고서야 어찌 가능할까? 

홍구공원에 자리한 매원에는 윤의사의 호 매헌을 딴 매정이란 2층 조선식 정자가 우뚝 세워져 있다. 입구에는 하얀 바윗돌에 '윤봉길의거현장'이라 씌어있고 의거행적을 양각하여 놓았다. 매정에 들어선 입구에는 매헌의 초상과 행초서의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이란 친필로 쓴 붓글씨였다. "사내대장부가 집을 나섰으면 뜻을 이루기 전에 살아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상해로 망명하면서 가족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백범의 한인애국단 단원이던 두 지사의 의거는 삼천만 대한인의 항일독립운동의 정점이었다, 두 독립의사의 의거에 대한 일제의 혹독한 조사에, 백범은 많은 한인 기관과 독립운동가의 피해를 막기 위해 성명서를 발표했다. "나 백범 김구는 대한민국 황해도 안악에서 맨손으로 왜놈중위를 때려죽여 국모의 원수를 갚았으며, 내가 애국단원 이봉창과 윤봉길로 하여금 동경 일황 저격과 상해 홍구공원 의거를 일으켰으니 한인이나 기관관련은 사실이 없다"는 내용을 보도케 했다.

이리하여 도쿄의 폭탄 의거와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시라카와 대장이하를 척살한 의거에 대한 주모자는 바로 백범이라는 사실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미 백범은 국내에서 왜군 장교를 척살한 죄로 감옥에 있었으나 고종황제의 특사로 풀려나기도 하고 또 다른 감옥에서 탈출한 애국지사요 독립운동가다. 그러기에 남북에서 백범과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의사에 대한 추모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가 연합군에 항복하여 광복이 되자 상해임시정부 요원들이 환국하는데 대우문제로 군정과 논란이 벌이고 있었다. 김구주석 이하 모두, 당연히 거국적이고 거족적인 환영받아야 했는데 결국 개인자격으로 환국하였다. 미군 수송기에 몸을 실은 백범은 토로했다. "우리 광복군이 양성되고 더 많은 군대를 키워 우리도 당당히 일제와 싸워 자주독립을 해야 했는데 그만 싸워보지도 못하고 연합군이 승전국이 되었다는 사실에 원통하다."고 했다.

백범은 자신의 지도로 순국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1947년 환국하는데 앞장섰다. 이미 자리한 효창공원 묘지에 국민장으로 거행하여 장례를 치렀다. 백범은 그들 애국지사들이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스스로 백범의 한인의혈단에서 수년간 거사를 예행하고 성공을 위해 지혜를 모으면서 동포와 형제의 정이 가득했다고 한다.

백범은 평생을 분단이 아닌 조국통일을 원했다. 그러기에 38선을 넘어 통일된 조국을 위한 남북 제 단체회담에 참가하여 통일정부를 주장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1949년 6월26일 정오, 경조장에서 육군소위 안두희 흉탄에 서거하셨다. 7월5일에 온 국민이 흐느끼는 가운데 대한민국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효창공원 독립애국묘지로 향한 백범은 거사 전에, 지하에서 만나자는 윤봉길 의사의 유언으로 남긴 말이 현실화 되었다. 효창묘원에 함께한 애국지사들과 아직 이뤄내지 못한 조국통일을 저세상에서 나누리라. 또한 조국의 통일을 이루지 못한 우리들에게도 질책을 하시면서 평화통일이 오는 그날을 기원하시리라.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윤의사 어록 중에서-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필경 의인이 나타난다. 그러나 과연 누가 귀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던지겠는가? 허나 한목숨 바쳐 조국과 민족이 영원토록 부흥한다면. 한번은 해 볼만 한 숭고한 정신이 아닐까? 이번 상해기행에서 의사들의 뜻이 심오하게 와 닿았다.

홍구공원에서 만난 매헌 윤봉길 의사가 나의 문중의 형님뻘이 되기에 더욱 추모했다. 내 비록 의사들처럼 젊은 나이는 지났지만 나라와 민족이 위태로울 때 기꺼이 이한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 견현사제(見賢思齊)심정의 의지를 기르고 싶었다. 언젠가 효창애국공원에는 존경하는 안중근의사도 환국하여 영면하시리라.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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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지난 5월에 처음 찾는 임시정부와 홍구공원이었다. 그동안 몇차례 중국을 방문했지만 상해와 홍구공원을 찾지못했다. 조국이 일제강점기를 극복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애국인사들이 상해에 모였다. 그곳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김구주석을 비롯한 많은 임시정부요인들이 활약상의 생생한 모습을 보았다. 감회가 깊었다

홍구공원에서는 매헌 윤봉길의사의 의거 장소에 매헌기념관이 한옥건물로 서있었다. 이담한 기념관은 윤의사의 유물들이 다시한번 의사의 뜻을 기리는 순간이었다. 이날 비록 찾지를 못했지만 안중근 의사의 하을빈 현장도 찾아볼 것이다. 우리의 선대 애국지사들의 활동현장과 순국의 현지를 찾는 일은 분단조국에 대한 통일의욕을 더욱 심화시키는 순간이었다.
#상해임시정부 #김구선생 #윤봉길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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