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법, 구한말로 우리를 되돌리다

신문지법의 망령, 되살아나다

등록 2009.07.30 19:55수정 2009.07.30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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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강제퇴위를 당한 후, 조선의 정계는 폭풍 속으로 휘말려갔다. 국가의 주권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하염없이 흔들리는 상황에도 당시 정계를 주도하고 있던 박제순, 이완용 등은 자신들의 이권과 정국 주도권을 챙기기 위해 여념이 없었고, 송병준을 위시한 일진회 세력은 이들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바탕으로 국정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 가운데 이완용 내각은 친인척과 측근세력의 전면적 배치를 통해 정국을 좌우하면서, 일제의 통감정치 하에서 군주제를 유지하되 그 정치체제의 핵심은 양반ㆍ귀족 중심으로 운영하고자 하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당시 내각에 참여하여 일종의 '여당 속의 야당'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송병준 등의 일진회는, 조선의 전면적 개변, 즉 구래의 양반 중심의 지배 질서를 해체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며 이완용 내각과의 대립각을 세웠다.


그러나 그 대립은 개항기로부터 이어진 개화ㆍ개혁운동의 올바른 방향 정립을 위한 논쟁도 아니었고, 언제 국권을 피탈당할 지 모르는 국가의 미래를 위한 정책의 경쟁은 더더욱 아니었다. 겉으로는 조선의 개변 방향성을 논한다는 미사여구로 화려하게 포장하였지만, 그 속내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충성 경쟁 속에서, 일제의 지원을 받아 어떻게 정권의 단 맛을 독점할 것인가를 두고 '진흙 밭의 개싸움'을 벌인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이에 대한 자주적 개화세력의 분노는 극심했다. 하지만 이미 같은 해 7월에 이루어진 한일신협약 (정미7조약)에 의해 군사권을 빼앗기고, 경찰권마저 위임되어 집회ㆍ결사의 자유마저 속박당한 상황에서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저항의 방법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결국 자주적 개화세력이 국민들에게 국가의 위기를 호소할 수 있는 방법은 언론, 즉 신문을 통한 의사 표현뿐이었다. 

1896년에 창간된 <독립신문>을 기점으로 본격화되기 시작한 조선의 근대적 신문은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쇄신하고 국민의 독립열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특히 신문을 통해 발표된 자주적 개화세력의 독립의지와 근대화 방안, 시민의식의 고양 유도 등은 국민들의 반향을 일으켜 만민공동회의 설립, 확대 등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일구어내었다.

이는 조선에서의 이권 약탈은 물론 장차 식민지화를 목표로 삼고 있던 일본제국주의 세력에게 있어 일정한 부담을 줄 수밖에 없었고, 결국 1890년대말부터 신문을 규제하기 위한 입법조치를 시도했다. 그러나 신문계의 반발과 정부 내 의견 대립으로 제정되지 못하다가 이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일제는 군사관계를 이유로 신문에 대한 사전검열을 실시하는 이외에, 당시 항일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된 신문을 보다 직접적으로 말살할 수 있는 명문화된 법령을 강제했다. 그것이 1907년 7월 24일 제정ㆍ공포된 신문지법이었다.

일본 메이지 시기의 여러 법령들을 참고로 통감부의 일방적인 초안을 조선 정부가 인정하는 방식으로 제정되었다. 당시 이완용 내각이 주도하던 조선 정부는 1899, 1906년 2차례에 걸쳐 신문조례의 제정을 시도해 신문지법을 강제할 수 있는 초안을 이미 마련해 둔 상황이었다. 여기에 이 법을, 이전의 고문정치를 보다 강력한 차관정치로 바꾸면서 항일봉기를 탄압하기 위해 제정한 보안법이 공포하기 사흘 전에 발표한 것은 그 본의를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즉 일제와 이완용 내각은 보안법과 신문지법이라는 양대 악법을 무기로,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자주적 개화세력의 입에 재갈을 채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신문지법은 부칙 3개조를 포함하여 전38조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제1~10조는 신문발행 수속과 관련된 일반 규칙으로 발행허가 절차, 신문발행 담당자의 자격, 보증금, 발행 이후 변경내용의 신고사항 등을 규정하고 있다. 또 제11조~16조에는 신문에 게재해서는 안 되는 사항이, 제17조~제20조에는 반드시 게재해야 하는 사항이 들어 있다. 제21조~35조는 이 법을 위반했을 경우 그에 따른 각종의 처벌규칙을 규정하고 있다. 나머지 부칙 3조는 이 법의 적용범위와 기존 신문에 대한 적용절차를 밝혀놓은 조목들이다.

이 법의 기본적인 성격은 신문을 발행할 때 반드시 내무대신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허가제와 보증금제도, 납본 - 즉 원고 -을 강제한 사전검열제, 구체적인 형벌사항까지를 규정한 엄격한 처벌제도에 있다. 따라서 이 법의 위반자에 대해서만은 1905년에 공포된 〈형법대전〉에 명기된 자수와 중복죄에 대한 형 감면조항과 보석금제도를 적용하지 않았고, 황실의 존엄모독, 국헌문란, 국제교의의 저해사항을 기재한 경우에는 그 신문의 인쇄 기계마저 몰수할 수 있도록 했다.  이외에도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풍속질서를 문란하게 한 신문의 경우 발행정지까지를 포함한 내무대신의 각종 행정처분권을 규정했다.


결국 신문지법은 신문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 가혹한 통제와 처벌규정이 모두 망라되어 있었고, 이 법의 제 규정에 의해 당대의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 등 자주적 개화세력이 운영하던 신문들이 줄줄이 폐간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통감부와 이완용 친일내각에 대한 일체의 비판을 틀어막고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은 이후, 그들이 조선에서 벌인 일은 자신들의 영화와 민족ㆍ민중의 안녕을 맞바꾼 것이었다.

얼마 전, 국회에서 일사부재의 - 의회에서 한 번 부결된 안건은 같은 회기 내에 다시 제출할 수 없다는 원칙 - 의 원칙은 물론 직접선거의 기초마저 부정하는 대리투표의 난장 속에서 미디어법이 통과되었다. 이완용 내각이 국권을 이토 히로부미에게 넘겨주는 가운데 반대여론을 말살하기 위해 신문지법을 만들었던 악몽을 체험했던 우리로서는, 이번 미디어법의 제정이 누구에게 우리의 권리를 넘겨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그것이 얼마나 급박한 일이었기에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 원칙마저 무시한 채 날치기로 통과시켜야 되는 일이었는지 불안 섞인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디지털 경성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디지털 경성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미디어악법, 일제시대, 이완용, #날치기,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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