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의 거인 조박의 노래와 이야기 한마당' 시드니 공연 모습.
윤여문
조박이 자신을 오사카인으로 규정하는 이유조박은 김민기의 '가뭄'을 부르면서 "1980년대에 한국의 저항가요를 열심히 배웠다"면서 "그즈음에 일본에서는 외국인에게 지문날인을 강요했는데, 그걸 거부한 많은 재일한국인이 체포됐고 약 600명이 고발당했다"고 밝혔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일본에서 차별받는 재일한국인과 아이누의 역사로 이어졌고, 같은 맥락으로 미국에서 차별 당했던 흑인 인권운동가 말콤 엑스의 비극적 생애를 소개하는 1인극 연기로 전환됐다.
무대의 열기를 최대한 고조시킨 조박은 '타향살이'를 처연한 음성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뭔가 할 말이 있다는 표정으로. 아니나 다를까. 그가 마침내 자신을 오사카인으로 부르는 이유를 털어놓았다.
"사람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고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국가라는 이름으로 경계선을 그어놓고 죽자 사자 싸웁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성도 상실하고 행복도 날아가 버립니다. 내가 아나키스트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진정으로 평화롭게 살고 싶으면 국가를 배경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주지역에서 이웃끼리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재일오사카인, 재일고베인, 재호시드니인처럼 거주지역의 주민으로 살아야 타향도 고향이 되고 싸움도 멈추지 않을까요."
말콤 엑스에 투영된 조박의 기구한 운명 그 무엇이 되고 싶었지만, 재일한국인이기에 포기해야 했던 조박은 어쩔 수 없이 일인다역의 삶을 살았다. 2004년에 조박을 소개한 KBS-TV <한민족 리포트> 프로그램에는 조박이 '노래하는 키네마' 형식을 빌어서 말콤 엑스의 생애를 재연하는 모습이 나온다.
빈한한 노동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무학(無學)이어서 글조차 읽지 못했다. 그는 아들이 대학에 가려 하자 "조선인이 대학에 가면 무슨 소용인가?"라며 말렸다. 이는 공부 잘했던 흑인 말콤 엑스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변호사를 꿈꾸자 담임선생님이 말했다. "말콤, 그건 불가능한 꿈이야. 차라리 목수가 되어라. 흑인에게 목수는 잘 어울리는 직업이다. 예수도 목수의 아들이었잖니. 네가 흑인이라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마라."
어엿한 인물(somebody)이 되고 싶었지만 보잘것없는 인간(nobody)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재일한국인들의 삶이 말콤 엑스의 비극적 생애에 아프게 투영된 것은 아주 자연스런 결과였다. 그래서일까. 그는 비극보다는 파토스(pathos, 페이소스)가 짙게 묻어나는 희극을 연기하고 싶어 한다.
조박은 고베 외국어대학교 러시아어과를 졸업하고 간사이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한 다음, 문학 석사를 취득해 간사이대학교 강사로 활동했다. 그런 그가 교수의 꿈을 접고 음악인이 된 것은 재일한국인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다행히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4개 국어에 능통해 잘나가는 영어 학원 강사가 됐다.
조선북을 부서지라고 두들기면서 조박은 한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영어에 능통하다. 호주 순회강연과 공연도 한국어, 일본어, 영어로 진행했다. 26일 밤에 열린 시드니 공연도 마찬가지였다. 공연장을 찾은 호주 현지인을 위한 배려였다.
기타를 들고 1부 공연을 마친 조박은 2부 공연 전에 호주공영방송 SBS라디오 한국어 프로그램 담당자와 인터뷰를 했다. 공연장을 찾지 못한 한인동포들을 위해 호주 전역으로 방송되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
북을 들고 나온 조박은 2부 순서를 시작하면서 '아리랑' 4곡을 연이어 불렀다. 일제강점기의 영화 <아리랑>에 삽입된 주제가, 진도아리랑,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 그가 영어로 아리랑에 얽힌 내용을 설명한 것은 호주 현지인을 위한 배려였고, 북을 들고 나와 민요와 판소리를 부른 건 한인동포를 위한 배려였다.
그는 민요를 부르면서 연신 북을 세게 두들겼다. 탁한 음성에서는 한국인 특유의 한의 정서가 묻어났고, 그가 뽑아내는 민요들은 북소리에 실려 한민족의 예술로 승화됐다. 특히 영화 <서편제>에 삽입된 '사철가'를 부를 때는 청중이 박수를 치면서 호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