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잖아요

자폐 학생과 보내는 비 내리는 날 이야기

등록 2009.07.21 15:24수정 2009.07.21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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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가 뻐근하고 몸이 묵직하다. 밖을 보니 비가 내린다. 잠이 깨기도 전 머릿속이 복잡하다.

 

'뭘 입나?' 바지를 입으면 빗물에 밑단이 젖어 찝찝하고, 밑단 젖는 게 싫어 치마나 반바지를 입으면 찬 기운이 다리에 스며든다. 비가 내리면 버스에 사람이 많다. 사람들 비집고 버스 타기도 힘들지만, 타자마자 안경에 김이 서려 시야가 흐려진다. 한 손은 우산 들어야 하고, 한 손은 손잡이 잡아야 한다. 안경 닦을 손이 없다. 그렇게 우스운 꼴로 얼마를 가야 한다. 비 내리는 날이 반갑지 않은 이유는 또 있다.

 

하루가 눈에 선하다. 아이들 엉덩이는 의자에 붙어있질 않는다. 목소리는 '솔'음, 복도에선 종일 달리기 경주가 이어진다. 한두 번 예상이 빗나갈 만도 한데, 이건 백발백중이다.

 

우재(가명)는 우리 반 3학년 학생이다. 비 내리면 아이들은 날궂이를 하는지 더 산만한데, 우재는 그 중 단연 돋보인다. 남부러울 것 없는 듯 기분 좋기도 하고, 세상 걱정 다 짊어진 듯 울상이 되기도 한다. 어느 때는 기분 좋았다가 금방 울상이 되는 변덕을 부려 주변사람을 당황하게 한다.

 

며칠 전 우재가 보인 행동이 비 내리는 날 긴장을 더했다. 자폐 장애가 있는 우재가 학교생활을 잘하도록 꼼꼼히 챙겨주는 짝꿍. 사람 많은 곳에선 뭘 안 먹어 학교 급식도 거의 먹지 않는 우재에게 밥·김치·오이무침을 먹인 짝꿍이라 더 기특했다. 다들 우재가 짝꿍을 좋아해서 잘 따른다고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짝꿍 어깨를 문 것이다.

 

누가 비 내리는 날 아니랄까봐 1교시 시작부터 심상치가 않다. 우재는 혼자 웃다가 불쑥 일어나 교실 문 열고 닫기를 몇 번, 쉬는 시간 컴퓨터에 앉아 있는 내게

 

"버즈(만화 영화 토이스토리 주인공 이름) 보자, 버즈 보여 주세요, 버즈 볼까?"

 

지치지도 않고 말한다. 나도 그에 질세라 일일이 대답한다.

 

"버즈는 집에서 봐요. 버즈는 집에서 보자. 버즈 안 봐!"

 

정신없이 수업을 마치고 우재네 전화했다. 학교 앞에서 식당을 하시는 우재 어머니께서는 바쁜 시간이라 우재를 데리러 올 수가 없다고 하신다.

 

"선생님, 그냥 보내세요."

 

맑은 날이면 혼자 식당을 찾아가니 보내겠지만, 아직 비가 그치지 않았다. 주섬주섬 우산과 우재를 챙겨 식당으로 향했다.

 

집에 가는 우재 수업이 끝난 후 우재와 함께 집으로 간다.
집에 가는 우재수업이 끝난 후 우재와 함께 집으로 간다.변상화
▲ 집에 가는 우재 수업이 끝난 후 우재와 함께 집으로 간다. ⓒ 변상화

식당가는 길가에 물웅덩이가 있다.

 

"우재야, 안 돼!"

 

 말 끝나기도 전에 발을 첨벙한다. 이미 척척해진 양말은 둘째 치고 무릎까지 물이 튀어 바지가 반은 젖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밉살스럽게 웃으며 '선생님, 오늘은 비가 내리잖아요'라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우재가 식당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돌아오는 길. 방금 전 물웅덩이 앞에 섰다. 돌아갈까, 뛰어 넘을까 때 아닌 고민을 하다 '에라, 모르겠다.' 물웅덩이를 밟았다. 사방으로 물이 튀어 옷이 젖는데도 이상하게 속이 후련하고 기분이 좋다.

 

물웅덩이  물웅덩이를 밟으니 이상하게 속이 후련하고 기분이 좋다.
물웅덩이 물웅덩이를 밟으니 이상하게 속이 후련하고 기분이 좋다.변상화
▲ 물웅덩이 물웅덩이를 밟으니 이상하게 속이 후련하고 기분이 좋다. ⓒ 변상화

"그래, 우재야 오늘은 비 내리는 날이다."
 
우재가 들어간 식당 입구를 보며 미처 못 한 대답을 한다. 비 내리는 하루가 간다. 일기예보를 들으니 이번 주 내내 비가 내린다고 한다.
2009.07.21 15:24ⓒ 2009 OhmyNews
#비 #물웅덩이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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