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 의장인 이원기 부산대 총학생회장이 15일 오전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앞에서 등록금넷 주최로 열린 등록금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에 참석했다가 기자회견장에 뛰어든 수십명의 경찰에 의해 강제연행됐다. 경찰이 뿌린 최루액을 눈에 맞은 한 학생이 경찰에 항의하고 있다.
권우성
필자는 얼마 전 한 대학 학보에 '20대 무망(無望)론'을 펼쳤다(
☞ 관련 글 바로가기). 빈틈이 많은 글이었던 만큼 많은 반론이 뒤따랐다. 필자의 코를 납작하게 하는 주옥같은 글이 적지 않았는데 이중 가슴을 깊게 후볐던 논리는 이것이었다.
'20대가 이렇게 되기까지 선배 세대는 무엇을 했는가'라는. 이른바 30대 이상 세대들이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지고한 가치를 진지하게 숭상했다면, 그렇게 해서 좀 더 영향력 있는 '연대의 힘'을 보여줬다면, 20대에게 이것이 사표(師表)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늦은 감이 없지만, 그래서 20대에게 '분노'의 필요성을, '연대의 힘'의 위대함을 나누고 싶다. 역사를 진전케 추동하는 것은 '분노'였다. 4·19, 5·18, 6·10, 2008년의 촛불 등 민주주의의 힘을 보여준 항쟁은 분노를 동력으로 삼았다.
민주화는 이랬고. 산업화도 마찬가지. 지난 반세기 동안 일궈온 경제 성장의 자양분 역시 '분노'였다. 혹자들은 '위대한 박정희 각하의 영도력'에 의한 것이라고 보지만, 실은 기층 민중이 품은 "더럽다. 우리도 ○○국보다 더 잘 살겠다"라는 투지의 소산이라고 해야 옳다. 그러나 이 '분노'라는 것이 개인의 범주에서만 머물 경우 화병만 낳을 뿐이다. '분노'는 단결된 힘으로 승화돼야 한다. 그렇다면 '연대'의 틀이 필요하다. 그래야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보수화'보다 심각한 문제는 '20대의 탈분노화'며칠 전 부산대학교 학생들은 그 과실의 맛을 봤다. 학교 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콘서트를 성사시킨 것이다. 가로막힌 교문을, 힘으로 눈물로 열었던 것이다. 총장실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점거할 수 있었던 과거 세대에게 이 풍경은 그리 새롭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산대 학생들은 엄청난 희생을 각오한 행동이었다. 가깝게는 학교 측의 학사 징계, 멀게는 취업 시 닥칠지 모를 불이익에 떨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공포를, 학생들은 '분노'로 누르고 '연대의 힘'을 통해 희망적으로 재구성했다.
공교롭게도 이 학교 총학생회장이 한총련에 이어 학생운동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떠오른 21세기한국대학생연합의 의장이라고 한다. 종로경찰서가 이 학생을 체포했다고 한다. '괘씸죄'가 다분했을 것이다. 뒤집어 보면 현 정부가 학생운동의 조직화에 적잖은 긴장감을 갖기 시작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존재가치를 미미하게 봤던 학생 계층을, '경계와 감시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이는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까. 모름지기 국운이 상승하려면 그 시대 20대의 힘이 강해야 한다고 하더라. 또한 그 힘이 '저항'의 방편으로 표출될 때엔 사회가 필연적으로 건강해지게 된다고 하고.
20대의 분노가 등록금으로 인한 시름을 삭힌다면. 20대의 분노로 너저분한 '인턴 떡밥'이 정규직 코스 요리로 승격된다면. 20대의 분노로 벼랑을 향해 뒷걸음질 치는 민주주의가 제자리로 돌아온다면. 20대의 분노로 힘없는 이들도 존대 받는 인간의 존엄성이 빛나는 사회가 건설된다면. 터무니없는 망상일까. 20대는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 자신의 진정성을. 힘을. 이 힘으로 세상이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자존감을 말이다.
'20대의 진보화'가 꼭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0대 보수화'를 백안시하고 싶지 않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20대의 탈분노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