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벙긋할 수밖에 없는 층층시하의 새댁이 정갈하게 차려 신랑에게 내놓는 밥상에 살짝 올려놓을 법한 연서 같은 쪽지가 그 책갈피 속에 있었습니다.
임윤수
꽃편지지에 또박또박 눌러쓴 손글씨, 또박또박 눌러쓴 손글씨가 가지런한 색지, 빼곡하지도 남아돌지도 않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손글씨가 담긴 색종이무늬가 책갈피처럼 인쇄돼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책을 읽기도 전에 가슴이 설레거나 연서를 받아든 느낌을 받는 건 처음입니다.
부챗살 같은 77편의 한시세살부채를 펼치듯 펼쳐든 책속엔 일 년 사계(四季)가 다 들어있습니다. 부챗살 보다는 조금 더 많을 것 같은 77편의 한시(漢詩)에는 춘심(春心)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봄, 장마와 더위로 뒤엉키는 여름, 섬돌 아래서 울어주던 귀뚜라미 소리를 그리게 하는 가을, 겨울눈에 뒤덮인 소복한 동심과 겨울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겨울까지 일 년 사계절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매화와 수양버들이 점벙점벙 건너고 있지 싶습니다'라고하며 펼치는 20편의 봄에는 매화도 있고, 개울물 졸졸 흐르는 작은 시내도 있습니다. 버드나무도 있고 저녁놀과 봄비도 있습니다. 한자로 된 한시의 봄과 번역 글을 손글씨로 정말 깔끔하게 정리해 놓았고 수행승인 흥선스님의 마음과 시심까지를 아지랑이 같은 덧그림으로 그려놓았습니다.
봄날, 술 익는 뉘 집, 달밤 살구꽃 아래서 꽃을 보며 봄 흥취에 잠기다 보면 봄은 어느새 지나고, 마당 위로 때글때글 쏟아지는 햇살에 여름이 익어가는 18편의 한시 여름이 펼쳐집니다.
한 편 한 편의 한시마다 여름하면 떠올릴 수 있는 유정무정의 삼라만상이 은둔자처럼 속닥속닥 들어있겠지만 한자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대개의 사람들이 단박에 한시를 읽거나 읊으며 시감을 논한다는 건 요원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77편의 한시로 엮은 '맑은 바람 드는 집'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대청마루에 늘인 문발처럼 켜켜이 손글씨로 쓴 한시와 번역글을 넣었고, 머리카락이라도 보일까봐 꼭꼭 한자(漢子)에 숨어있는 시감까지를 흥선스님이 콕콕 집어내어 당신의 마음까지 보태 설명문으로 덧그렸으니 불어오는 산들바람처럼 절로 마음에 녹아듭니다.
한 수 한 수, 부챗살처럼 펼쳐든 한시를 음미하다 보면 '하늘 단풍이 하도고와 그 아래 흰 옷을 입고 서면 쪽빛 물이 들 것만 같은 나날로 들어가는' 가을이 19편의 한시로 열려 있습니다.
저만큼 가버린 가을조차도 성큼 다가올 것 같은 가을이 조롱박처럼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강 위에서, 흐르는 물을 보며, 임을 보내며 떠올리는 가을이 그려져 있고, 가을날 밤에 벗의 집에서, 가을소리 듣는 나무아래 앉아 마음으로 쓰는 고향편지도 담겨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