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장 장례행렬장례행렬에서 상주는 후학들의 뒤편, 맨 마지막에 선다.
이 씨는 “자식들이 아버지랑 더 가까운데 제일 끝에 서서 서운했다”고 말했다.
윤경선
유림장은 덕망 있는 유학자가 돌아가셨을 때 후학들이 지내는 장례의식으로 초상난 달을 넘기는 유월장(踰月葬)으로 치러진다. 일제강점기 이후 거의 사라져, 화재 이우섭 선생의 유림장은 87년 추연 권용현 선생, 97년 인암 박효수 선생 다음으로 세 번째였다. 이우섭 선생은 별세할 때까지 10권의 저술을 남겼고 200여명의 문하생을 배출했다.
그가 유학자인 아버지를 다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들 공부하는데 일이 만 원도 못주면서 돈 생기면 계속 서원만 짓는 거라. 어머니는 서원 청소며 뒷바라지 하느라 온갖 고생을 하시는데 말이여."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계기는 대기업에 근무하던 시절 사업계약차 유럽에 출장 갔을 때의 경험이다.
"프랑스 리옹에 가면 건축물이 전부 세계 문화재거든. 역사의 가치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여. 2500년 된 집이 그대로 있더라고. 이탈리아 가 봐. 제일 오래된 호텔이 제일 비싸. 역사의 가치지. 우리나라 국민 소득이 2만 달러가 넘어서고 있지. 그러면 뿌리를 찾게 돼 있어. 그게 자연스러운 거거든."
그는 "차도 좋은 거 몰고 애들에게도 넉넉하게 주면서 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지만 아버지가 못 이룬 뜻을 이어가는 일이 더 소중하게 생각 된다"고 말했다. 그의 할아버지 월헌 이보림 선생의 학덕을 기리며 유림들이 지은 월봉서원은 재개발 여파로 아파트 숲 한가운데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다. 재개발 와중에 없어질 뻔 했는데, 김해시청과 경남도청, 문화재청을 오가며 문화재로 등록해 월봉서원을 지킨 것은 이광규씨였다.
"지금은 애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이거 팔아 1억씩 나눠주는 것보다 '역사'를 물려주는 게 더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
그에겐 두 딸이 있다. "솔직히 얘기해서 애들한테 미안한 게 많지. 자주 못 만나고, 많이 못 해주니까. 그래도 잘 자라주니깐 고마운 거지. 난 기준이 그거여. 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라. 지가 추구하는 뭔가가 있어야지." 그의 두 딸은 크리스천이다. "내가 말은 안 해도 딸들이 절을 안 한단 말이야. 통탄할 일이지. 마음속으로 많이 야속하지만, 이해해야지 어쩌겠어." 그는 "부모 자식 간에 종교가 다르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서로를 인정하는 게 맞는 것"이라며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유학도 하나의 종교라고 봤을 때 그는 모든 종교에서 우선되는 가치가 '행동'이라고 본다고 했다. 그에게 '효'는 "어머니한테 마음속으로 산삼 백 뿌리 사드릴까 생각하는 것보다 얼른 쑥이라도 뜯어서 국을 끓여 드리는 것"이다. 기독교든 불교든 기도문과 경전 외는 것보다 실천하는 게 중요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보통 사람들 눈에는 번거롭고 복잡해 보일 수 있는 유림장 절차와 3년 상이 그에게는 행(行)을 하기위한 최소한의 격식인 셈이다.
"먹고 살만하면 뭐 하겠노? 가치 있는 게 뭐겠노? 뭐 도박, 섹스, 나쁜 것들은 해봐야 한계가 있거든. 가치 있는 데로 갈 수밖에 없어."
그에게 3년 상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삶의 양식 중 하나였다.
인터뷰를 마친 이튿날 아침, 천방농산에서 나온 그는 여느 때처럼 월봉서원에 있는 어머니 김문협(78)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저 광귭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덧붙이는 글 | 손경호 기자는 세명대학교 저널리즘 스쿨 대학원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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