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는 본래 거대 호수였고, 공룡이 들끓었다

[대구를 찾아서 7 ]고산골

등록 2009.07.05 11:22수정 2009.07.07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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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골 입구 저 멀리 앞산 정상이 보인다. 사진에 보이는 바위 곳곳에 공룡 발자국과 연흔, 건열 화석이 있다. ⓒ 정만진


대구를 비롯한 경상도 일대는 본래 땅이 아니라 거대한 호수였다. 물가에는 갖가지 식물들이 무성한 법이므로, 대구 주변에는 수많은 공룡들이 노닐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공룡 발자국, 끝없이 밀려왔다 물러가기를 반복한 물결이 이윽고 돌 위에 만들어낸 자국인 연흔 화석, 물기가 마르면서 생겨난 건열 화석 들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옛날 효성여대 부지(지금의 효성타운)에서 앞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흔히 고산골이라 부른다. 지금은 무수한 식당들이 앞산 정상까지 가는 등산로 입구를 온통 뒤덮어버려 오묘하고 그윽한 정취는 찾을 길이 없지만, 이곳 고산골은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지금하고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던 심심산중이었다. 여기서 13년째 옻닭집을 하고 있는 배태순(71) 할머니가 지금도 간판조차 걸지 않은 채로 장사를 계속하고 있는 모양을 보면 옛날의 풍정은 저절로 떠오른다.


"길가에 있지도 않고, 간판도 없고, 그저 옻닭 판다는 조그만 나무판 하나 덜렁 남의 가게 담장 옆에다 세워뒀다고 장사가 됩니까? 그렇다고 그 나무판에 전화번호가 있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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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째 고산골에서 식당을 하고 있는 할머니가 거리에 내놓은 입간판 이 식당은 간판도 없고, 전화번호도 없고, 주차장도 없다. 거리에 내놓은 이 입간판이 유일한 홍보 수단이다. ⓒ 정만진


그러나 이렇게 다그치는 것도 다 부질없는 일이다. 집이 골목 깊숙한 곳에 있다는 지적에는 "옛날엔 오솔길에 붙어 있었는데 신작로가 나면서 그 길을 막아버려서 그래 됐지," 하고, 간판을 왜 달지 않느냐는 데에는 "대문에 달아도 길가에선 보이지도 않는데 그걸 달면 뭣해?"하고 낮게 대답하던 할머니가, "전화도 없이"라는 말에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옷속 깊숙이 감춰두고 있던 휴대전화기를 당당하게 꺼내는 까닭이다.

"번호 여기 있는 줄 단골들은 다 알어. 010-6562-6202야. 우리집은 그냥 불쑥 들어오면 먹을 게 없어. 미리 두 시간 전에 예약을 해야 돼. 미리 끓여놓았다가 팔지는 않거든. 그럼 맛이 없지. 옻나무도 진짜고. 그래도 요샌 영 손님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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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런 식당은 고산골에서 찾기가 어렵다 꼬불꼬불한 골목으로 찾아들어가야 하는 할머니네 옻닭집. 호화찬란한 현대식 식당들 사이에서 13년간 끈질기게 생명을 부지해 왔다. ⓒ 정만진


1990년대 초반까지는 고산골에 식당이 두 집밖에 없었다는 할머니의 말은 사실이다. 1980년만 해도 찬물이 콸콸 흘러내렸으므로, 이 고산골을 비롯한 앞산의 골짜기들은 한결같이 대구 시민들의 피서지이자 휴양지로 각광을 받았다. 어지간한 부자 이외에는 자가용이 없었으니 모두들 버스를 타고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늦게까지 남과 밤을 가리지 않고 몰려들었다. 그래도 으리으리한 식당건물은 없었고, 식당가가 끝나는 부분에 고산골 물가로 떨어질 듯 남아 있는 집 한 채와(이 식당은 폐업한 지 오래되었고, 집은 현존함) 배태순 할머니가 하던 단 두 집만 음식을 팔았다. 그러나 지금은 종류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식당들이 호화로운 위용을 뽐내며 즐비하게 서 있다.

십수 년만에 고산골은 그렇게 변해버렸다. 물론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고산골이 끊임없이 변해온 유구한 역사만큼이야 돌변을 했을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이름부터가 그렇다. 고산골의 유래는 무엇일까? 고산골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여러 사람들을 붙들고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시원한 대답을 들려주는 이는 없었다. 결국 대구광역시와 경북대학교가 공편(共編)한 학술조사연구보고서『비슬산․속편』을 읽어보았다.


신라 시대 때 왕실에 대를 이를 왕자가 없어서 걱정하던 시절이 있었다. 온갖 용하다는 의원을 불러오고 약을 써보아도 왕비의 몸에 태기가 없어서 왕이 근심으로 나날을 보내는데, 하루는 왕의 꿈에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고산골이 있는 자리에 절을 세우고 불공을 드리면 왕자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불공을 드렸더니 과연 왕비의 몸에 태기가 있고 왕자를 얻을 수 있었다. 왕이 기뻐하여 그 절에 석탑을 세웠다. 그런데 고산사는 창건 당시 모습대로 존재하지 않고 임진왜란 때 부서졌다. 임진왜란 당시 왜병이 고산사 석탑 안의 보물을 훔쳐가려다가 벼락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산골 인근을 탑동네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옛날 고산사가 있던 자리에 세워져 있던 석탑에서 연유한다고 한다.

대략 추론하면, 고산사가 있던 자리라 하여 골짜기에 고산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없어진 지 어언 5백년을 헤아리는 고찰과 탑을 찾아 고산골을 드나들 수는 없는 일이니, 시민들은 그저 '웰빙'을 목표로 한가한 짬을 내어 이곳을 찾는다. 다만 유일하게 옛날의 흔적으로 여겨지는 것은, 신라 시대 스님들 때부터 애용한 것이 아니었을까 여겨지는 고산 약수터이다. 산 중턱쯤의 무성한 그늘에 호젓이 남아 있는 약수는 대기오염에 찌든 현대인들을 자못 유혹하고도 남는 천연의 유적(遺跡)인 셈이다.


더 오래되어 보이는 옛날의 흔적도 없지는 않다. 그리 모양새가 대단하지는 않지만 물결 무늬 화석인 연흔(Ripple mark)도 있고, 1억만년 전 중생대 백악기의 것으로 여겨지는 공룡 발자국 화석(Dinosaur foodprint)도 있으며, 지층의 수분이 증발하면서 만들어진 다각형 무늬인 건열(Mud crack)도 있다. 식당이 늘어선 지점은 끝났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등산로가 시작되지는 않은 길가에 그들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심코 안내판을 스쳐서 지나간다. 안내판을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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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 발자국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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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흔 화석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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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열 화석 ⓒ 정만진


앞산 고산골에 나타나는 공룡 발자국 화석은 약 1억만년 전 중생대 백악기의 것으로 등산로 아래 개울가의 넓이 23〜26㎠의 평탄한 암반(퇴적암) 하상에 4〜5개가 나타난다. 이 공룡 발자국 화석은 세 개의 발가락 흔적이 보이는 조각류와, 원형의 용각류에 속하는 초식의 것으로 추정되며, 발자국의 크기는 20〜30㎝ 정도 내외다.
이곳에는 얕은 호숫가에 형성되는 물결 무늬 화석인 연흔과 물이 말라 건조한 환경에서 생기는 건열 화석도 나타나고 있어 공룡 발자국 화석과 더불어 당시의 환경을 짐작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당시 고산골을 비롯한 경상도 일대는 거대한 호수로 지금보다 고온다습하였고, 공룡의 주요 먹이인 식물도 무성하였을 것으로 보여 수많은 초식 공룡들은 풍부한 식물을 먹이삼아 드넓은 호숫가를 평화롭게 걸어다녔을 것이다. (대구가톨릭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 전영권)

이제 고산골에는 고산사도 없고, 탑도 없다. 물론 공룡도 없고, 바위에 흔적을 남길 만큼 세찬 물길도 없다. 모든 것이 다 전설이 되었고, 화석이 되었다. 머잖아 배태순 할머니의 '선지국할매집 골목끝집'이라는 나무 안내판도 비바람에 삭아 없어질 것이고, 그때쯤이면 인터넷에 떠도는 이 글을 읽는 대구 시민들 중에는 고산골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신인류'도 드물지 않게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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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골 건너편의 현대적 풍경 고산골 입구에서 바라보는 수성못 방면. 언젠가는 고산골 일대도 이처럼 변하여 지난 날의 자연스런 풍광은 완전히 자취를 감출 것이다. ⓒ 정만진


할매에게 전화를 걸어 옻닭을 끓이기 시작하라는 주문을 넣어야겠다. 이제 두어 시간 지나면 어둑어둑한 어스름이 찾아오니, 거대한 호수였던 경상도 일대를 먹이를 찾아서 배회하던 공룡처럼  더위를 피해 고산골로 천천히 들어가야겠다. 비록 윤동주는 아니지만 고산골에서 밤바람을 쏘이며 동동주 한잔을 거후르고 나면 우리도 호기롭게 읊조릴 수 있으리라.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고산골 "공룡 발자국, 연흔, 건열 화석지" 안내판
건열(Mud crack) : 이토(泥土), 점토(粘土), silt(모래보다 잘지만 진흙보다 굵은 입자)로 된 지층의 수분이 증발하면서 수축하여 다각형의 무늬 모양을 보이는 것으로 석호, 호소 주변, 해안가에서 볼 수 있다.

연흔(Ripple mark) : 지층 표면의 물결 모양으로서, 지층의 퇴적 당시에 형성되거나 해안, 하천 바닥의 모래땅 표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바람, 유수(流水), 파랑(波浪)의 작용으로 형성되며, 비대칭적인 수㎝〜 10여㎝에서 대칭적인 10㎝〜 수m의 물결 모양을 나타낸다.

조각류(Ornithopoda) : 2족 보행을 하는 초식 공룡으로 뾰족한 부리와 많은 수의 이빨을 지녔다. 육지나 물가에 살면서 대부분 두 발로 걸었으나, 간혹 네 발을 사용하여 걷는 종류도 있었다. 이구아노돈, 하드로사우루스, 드리오사우루스 등이 있다.

용각류(Sauropoda) : 쥬라기에서 백악기에 번성한 공룡 무리로 4족 보행을 하고 긴 목과 꼬리를 가진 초식 공룡이며, 지금까지 지구에 존재했던 가장 큰 생명체이다. 브라키오사우루스, 디플로도쿠스 등이 있다.
#공룡 #고산골 #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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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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