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미래에셋
박 회장은 1958년생으로 광주에서 태어났다. 중농의 집안에서 자라나 전라도의 명문 광주일고를 거쳐 1978년 고려대에 입학했다. 흥미로운 것은 대학교에 다닐 때부터 주식투자에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집에서 부쳐준 생활비를 밑천으로 명동 증권가를 돌아다니며 '실전 경험'을 쌓았다고 한다.
루머나 정보에 의존하지 않고 분석에 기초하는 그의 투자는 '승률'이 높았고 그에 따라 '고객'들도 늘어났다. 1984년 서울 회현동 코리아헤럴드 빌딩에 내외증권연구소를 설립하고, 한국 자본시장에서 일하겠다는 꿈도 무르익는다.
1986년 '큰 물'로 옮긴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당시 업계 최고의 스타로 꼽히던 이승배 상무에게 '한 수'를 배우기 위해 박 회장은 동양증권 영업부에 입사한다. 여기에서 박 회장은 예의 뛰어난 성과를 거뒀고, 그가 속한 영업부는 전국 약정순위 1등이었다고 한다.
얼마 후 박 회장은 동원증권으로 일터를 옮긴다. 그곳에는 당시 동원증권 인사담당 임원이었던 김정태 전무(전 국민은행장)가 있었다. 김 전 국민은행장이 박 회장의 맏형 태성씨의 광주일고 동기동창이었다는 점도 이직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동원증권 중앙지점장으로 발탁되면서 '박현주 신화'는 본격적인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다. 그때 나이 33세, 최연소 지점장이었다. 2년 만에 중앙지점을 전국 1등으로 올려놨고, 압구정 지점장으로도 혁혁한 성과를 거둔다. 이런 '전과'를 바탕으로 1995년에는 이사로 승진한다. 역시 최연소 임원 승진 기록이었다고 한다.
그는 2007년 자서전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를 통해 "대학 2학년 때 주식투자를 하면서, 나는 '소수의 시각'을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남들처럼 군중심리에 휘말려 다수가 투자할 때 같이 투자하면, 수익보다는 손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이런 투자 경험이 자연스레 비즈니스에도 이어졌다"고 회고하고 있다.
미래에셋 성장사에도 드러나는 '소수의 시각'미래에셋 성장사를 살펴보면 역시 '소수의 시각'이 드러난다. 창업 초기, 미래에셋캐피털 시절 다음커뮤니케이션에 24억원을 투자해서 1000억원을 번 것부터 그랬다. 여기서 번 돈을 '종잣돈' 삼아 박 회장은 미래에셋자산운용을 설립하는데, 이때 자산운용이란 개념을 국내에 처음 도입했다고 한다.
그리고 선보인 상품이 바로 국내 최초의 뮤츄얼 펀드인 '박현주 1호'다. 다수의 투자자가 돈을 모아 거대 자금을 자본금으로 납입하는 형태로 '폐쇄형 펀드'에 속한다. 일정 기간 돈을 찾을 수 없어 고객들 반응이 신통치 않을 것이란 게 당시 업계의, '다수의 시각'이었다.
그러나 박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투자자가 곧 주주가 되는 상품이고 따라서 투명성을 크게 높일 수 있어 이런 특성이 당시 고객들의 시대적 요구와 부합할 것이라 내다봤다. 이런 분석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판매 2시간 30분만에 500억원 한도가 모두 팔려 나가는 놀라운 성과를 거둔다.
'소수의 시각'은 부동산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외환위기 당시 현재 미래에셋그룹 본사 건물인 한국유리빌딩을 매입한 것이 대표적인 예로 회자된다. 주위에서 부동산 경기가 어렵다고 대부분 말렸지만, 지금 시세는 그때보다 3∼4배 이상 올라간 상태다. 이런 식으로 매입을 결정한 연수원도 600∼700억원 이상 자산가치가 올라갔다고 한다.
이처럼 '소수의 시각'에 기반한 경영성과는 그 외에도 다양하다. 미래에셋하면 떠오르는 적립식펀드를 통해 펀드 대중화를 이끌었고, SK생명을 인수해 투자형 보험인 변액보험을 주력상품으로 하는 보험회사로 탈바꿈시켰다. 국내 자산운용업계에서 해외현지법인을 설립한 것 역시 미래에셋이 최초다.
박현주 2호는 '소수의 시각'에 집중된 영향력이 부른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