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아줌마팬들도 반해버린 '조선인 소설가'

[해외리포트] 재일조선인 작가 양석일, 일본의 양심을 쏘다

등록 2009.06.24 12:16수정 2009.06.24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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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이 되어서야 글을 써서 생활을 할 수 있게 됐지요. 그러니까 글만 써서 먹고살게 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지난 겨울, 초청강연회에서 소설가 양석일 선생을 만났을 때 직접 들었던 이야기다.

양 선생은 요즘 일본 아주머니 팬들이 집 앞까지 찾아와 사인을 요청하고 선물을 보내와서 어리둥절할 때가 있다고도 했다.

양석일. 무라카미 하루키나 요시모토 바나나를 필두로 한 일본 작가들이 1990년대부터 한국 독자들 사이에서 선풍을 일으켰던 시기에 재일조선인 출신 양석일이 일본 독자들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은 한국인들에게는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양석일은 일본 내에서 대중적 팬을 확보한 몇 안 되는 소설가 중 한 명이 된 지 오래다. 그는 로맨스 소설이나 SF 같은 세계적 흥행코드와는 거리가 먼 자전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나 식민지 사생아로서 경험을 전면에 내세우며 일본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오랫동안 일본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양석일의 작품세계를 소개한다.

 2009년 1월 15일, 와세다대학 초청강연회에서 연설중인 양석일 선생.
2009년 1월 15일, 와세다대학 초청강연회에서 연설중인 양석일 선생. 곽형덕

일제가 낳은 식민주의의 '사생아' 양석일


양석일(梁石日)은?
1936년 8월 20일 오사카에서 제주도 출신 아버지 양준평과 어머니 이춘옥의 장남으로 태어나, 1952년 오사카 부립 코즈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55년에 졸업했다.

1954년(18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1955년 맹장으로 진료소에 입원했다가 당시 입원 중이던 김시종과 만나 그 인연으로 김시종이 주재하던 '진달래'의 동인이 되어 현대시에 눈뜨게 된다. 1957년 조총련과의 대립으로 진달래가 폐간되자 1958년(22세) 김시종과 함께 동인지 '카리온'을 창간한다. 그러나 1960년 '카리온' 폐간 이후 양석일은 문학과 멀어져 간다. 1961년 결혼한 그는 그 해 어머니가 사망하고 남편의 폭력에 못 이겨 3살 위인 누나도 자살하는 등 개인적인 불행을 맞는다. 1962년 득남하고 아버지와 화해한 후 인쇄회사를 차리지만, 1966년(29세) 인쇄회사가 도산하여 큰 빚을 지게 된다.

이후 여자와 술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거듭하고 빚 독촉에 시달리는 삶을 거듭하다, 1970년(34세) 헨리 밀러의 <남회귀선>을 읽고 충격에 빠진다. 갱생을 위해 동경으로 가서 택시운전사가 되어, 1978년 <문예전망>에 옴니버스소설 '미로' '신주쿠에서' '공동생활' '제사'를 발표하고 소설가로서 첫 발을 내딛게 된다. 1980년 택시운전 중 교통사고를 두 차례나 당하고 퇴사한 후, 1981년 첫 소설집 <광조곡>을 간행한다. 1985년(49세) 생활고로 자기매트 판매에 종사하기도 하였지만, 전업 작가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6년 일본에서 출판된 <재일문학전집>에 작가 스스로 집필한 '양석일의 작가 이력'(상자기사 참조)을 보면 그는 실패와 좌절의 나날을 거듭한 끝에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그가 소설가로 자리 잡은 것은 사업 실패 후 방랑생활을 하다 도쿄에서 택시기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던 체험을 글로 옮기면서부터다.


양석일이 택시기사가 된 것은 그가 작가가 되는 데 매우 결정적 사건이었다. <택시드라이버>(택시광조곡) 시리즈(1978~)의 첫 문장도 양석일의 택시 운전 체험담으로 시작된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데다 사채업자들까지도 무시하는 택시운전수를 오래하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잠시 견딜 요량으로 몸담을 생각으로 하고 있을 뿐이다. 기회만 있다면 전직(轉職)을 고대한다. 하지만, 1년이 2년, 3년이 5년이 되는 동안에 전직의 기회는 멀어져가게 된다. 일반회사에서는 연공서열식으로 급료가 가산되어 불완전하기는 해도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지만, 택시 운전사는 그와 반대이다."

양석일은 <택시드라이버> 속에 '재일조선인'을 오버랩 시켰다. 당시 그에게 택시운전은 도시의 중심부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던 재일조선인의 삶(diaspora)을 매우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직업이었다.

이 외에도 양석일의 작품에는 작가 자신의 체험이 깊이 투영돼 있다. 양석일에게 아버지 양준평은 '폭력' 그 자체였다고 한다. 그 폭력이 얼마나 심했던지 1967년, 당시 30세였던 양석일이 아버지 양준평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피신했을 정도라고.

작품 <피와 뼈>(1998)는 1996년 7월부터 1997년 4월까지 잡지 <산사라>에 연재된 200자 원고지 1000매 분량의 대작으로, 양석일의 아버지에 대한 체험이 뿌리 깊게 투영돼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양석일의 친아버지인 양준평을 그래도 옮겨놓은 듯한 김준평이 등장한다.

양석일이 <피와 뼈>에서 표현하려 했던 폭력의 구조는 매우 중층적이다. 재일조선인의 비극을 양산한 근본적인 폭력은 국가(일제)이다. 일제에 의해 오사카 등지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일본사회의 다양한 폭력(언어를 비롯해 의식주에 이르기까지)에 시달린다.

하지만 재일조선인 사회 내에서도 폭력 구조는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라는 구조 속에서 재생산된다. 이러한 중층적인 폭력구조 속에 김준평의 폭력이 위치하고 있다. 즉, 일본이라는 집단의 '폭력'에 의해 완전히 소외된 김준평이 제국의 폭력 안에 편입되어 약한 자 및 가족(동족)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음이 <피와 뼈>에 나타나는 '폭력'의 이중구조이다.

 양석일의 책. 왼쪽부터 <밤을 걸고>, <피와 뼈>, <암흑속의 아이들>
양석일의 책. 왼쪽부터 <밤을 걸고>, <피와 뼈>, <암흑속의 아이들>양석일

양석일은 <피와 뼈> 이후, 동시대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어린이 성매매를 다룬 <암흑 속의 아이들>(2002)과 '제국(네그리와 하트)' 시대의 새로운 질서에 대한 '대항' 및 '저항'을 그린 <뉴욕지하공화국>(2006)에서 이어가고 있다. 그 밑바탕에 재일조선인 2세라는 자각과 함께 자신이 일제가 낳은 식민주의(colonialism)의 '사생아'라는 '실존인식'이 깔려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vs. 양석일

무라카미 하루키나 요시모토 바나나 등 1980년대 이후 일본소설 대부분은 포스트모던을 '자유'와 '다양화'라는 이름 아래 받아들이면서 '탈역사', '탈중심'의 구조를 작품 속에 그려냈다.

반면, 양석일 소설에는 '도쿄'라는 거대 도시의 바깥으로 밀려나가는 혹은 '세계'의 바깥으로 밀려나가고 있는 가지지 못한 자, 노동자, 어린이들에게 가해지는 가차 없는 '폭력'이 전율을 느낄 정도로 리얼하게 그려져 있다. 이러한 '폭력'은 특히 '여성독자'들에게 혐오감을 안겨주기도 해서, 양석일은 '마초'나 '권위주의자'라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피와 뼈>에서 보여주듯 양석일의 작품 속에 드러나는 폭력의 구조는 매우 중층적이다. 일본(또는 세계)이라는 집단의 '폭력'에 의한 '이단 추방' 및 '만장 일치성'은 '비교하고 차별화하고 질서화하고 배제'시키는 논리를 통해 약한 자 및 가족(동족)에게 폭력을 가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양석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세계인식'이며, <암흑 속의 아이들>에서도 이러한 구조는 그대로 반복된다.

1990년 이후 일본이 장기불황의 늪에 빠져들면서 일본 독자들의 관심도 달라졌다. 많은 젊은이들이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게 되면서 2008년 <게공선>이 대히트를 기록했고, 공산당 입당자도 늘어났다. 동시대 작가가 아닌 1930년대에 활동했던 코바야시 타키치가 호출되는 현재 일본문학의 상황을 보면, 양석일이 각광을 받고 있는 이유를 잘 알 수 있다.

 영화 <피와 뼈> 포스터. 소설 <피와 뼈>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좋은 반응을 얻었다.
영화 <피와 뼈> 포스터. 소설 <피와 뼈>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좋은 반응을 얻었다. 피와뼈

양석일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피와 뼈>(1998) 이후부터였다. 사실 그 이전까지 양석일은 재일작가 중의 한 명이었을 뿐, 문학상과도 인연이 없는 작가였다. 물론 일부에서는 강렬한 작품 세계로 주목을 받았지만, <피와 뼈>는 양석일을 일본 최고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양석일은 <피와 뼈>로 제11회 야마모토 슈고로상을 수상하고, 나오키상 후보에도 올랐으며, 일본 문단에서도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양석일의 문학적 도정을 처음부터 지켜본 다카하시 도시오 와세다 대학 문학부 교수는 하루키와 양석일의 차이점을 아래와 같이 말하며, 양석일의 문학이야말로 '세계문학'이라는 결론을 도출한 바 있다.

다카하시 도시오 교수는 하루키가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등장했을 때 일본에서는 도시문화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는데 하루키와 양석일이 거의 동시에 등장한 것은 매우 흥미롭다고 하면서 두 이질적인 문학성에 주목했다. 그는 세계문학이라고 불리는 하루키의 문학은 고도자본주의의 보편성만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지만, 전 세계적인 모순을 소설세계로 형상화하고 있는 양석일이야말로 세계문학이라고 했다. (계간 <아시아>, 2007년 여름호, 필자역)

그의 작품성과 흥행성, 한국에서도 먹히길

 소설 <암흑속의 아이들>도 영화화됐다.
소설 <암흑속의 아이들>도 영화화됐다. 암흑속의아이들
양석일의 인기는 그의 작품이 4편이나 스크린으로 옮겨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1993년 최양일 감독이 양석일의 원작 <광조곡>(1981)을 <달은 어디에서 뜨는가>로 영화화한 것을 시작으로, 2002년은 재일 연극인 김수진 감독이 <밤을 걸고>를 영화로 만들어 호평을 얻었다.

이어 2004년, 최양일 감독은 한국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기타노 다케시와 오다기리 조를 주연으로 내세워 <피와 뼈>를 영화로 만들면서 흥행에 성공을 거뒀다. 동남아시아의 장기매매와 아동 성매춘이라는 충격적인 소재를 그려낸 <암흑속의 아이들>도 2008년 사카모토 준지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져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원작 소설이 35만부를 넘기는 판매고를 올렸다. 이 영화에는 쓰마부키 사토시, 미야자키 아오이를 비롯해 일본 유명배우들이 출연했다.

이러한 소설과 영화 두 마리 토끼가 다 흥행에 성공을 거두면서 양석일은 2009년 현재 일본문단 안에서 상업성과 작품성 양쪽을 다 갖춘 작가로 성공대로를 달리고 있다.

2008년 12월, NHK에서 방영된 '양석일 특집'(4회 100분)은 양석일이 일본 독자들에게 폭넓게 수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2008년 12월, NHK 양석일 특집 방송 안내.
2008년 12월, NHK 양석일 특집 방송 안내. NHK화면캡처

양석일은 일본문학이 이룩하지 못한 '자기비판' 및 '식민주의 청산'이라는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양석일은 일본 독자들에게 생경한 소재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며 '대중적인 소재' 속에 그것을 풀어놓는다. 그것이 양석일이 '대중작가' '통속소설 작가'라는 오명과 함께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양석일의 문학은 일본의 현대문학이 달성하지 못한 일본사회의 '원죄의식'은 물론 '공생'과 '연대'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대중에게 환기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한반도의 비극적인 근현대 역사 속에 고통 받은 '개인'의 문제를 밀도 있게 그려낸 양석일의 소설이 일본에서 소비되는 현실은, 자신들에게 결여된 것을 외부에서 찾으려는 시도라는 측면에서 하루키나 바나나가 한국에서 소비되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양석일의 소설은 한국에도 <달은 어디에 떠 있나> <피와 뼈> <밤을 걸고> 등 단편집과 장편 2편이 번역되었고, 다른 작품의 번역도 현재 진행 중이다.

양석일 소설이 한국에서 요시모토 바나나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만큼은 아니더라도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기를 기대한다.
#양석일 #피와 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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