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온달보다 더 바보였던 평강공주

타협할 줄 모르는 세상의 모든 바보를 위하여

등록 2009.06.17 20:22수정 2009.06.18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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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는 적지 않은 바보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중 가장 유명한 바보는 고구려 때의 '바보 온달'이다. 본디 멍청하기 그지없던 주제에, 현숙한 부인을 얻은 덕으로 팔자를 고친 인물의 대명사로 지칭되는 사내. 그 때문에 대한민국 남성이 가지는 콤플렉스 중 하나인, 마누라 덕에 팔자 고치기 욕망인 '온달 콤플렉스'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 온달. 그가 바보로 불린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를 <삼국사기>를 통해 확인해 보자.

…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평원왕) 때의 사람으로, 얼굴은 우습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밝았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저자거리를 왕래하니, 사람들이 그를 보고 '바보 온달'이라 불렀다. …


바로 이 부분이 온달이 바보로 불린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바보로 칭해진 이유는 지능이 낮아서나 행동에 모자람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살았으면 훨씬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을 그러지 아니하고, 노모를 제대로 모실 '능력'도 되지 않는 평민 '주제'에 귀족도 지키기 힘든 인간의 도리를 지킨답시고 깝죽대는 게 보기 싫었던 사람들의 질투와 멸시가 만들어낸 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런 바보가 올바른 사람으로 거듭 나는 계기가 더 큰 바보를 만나면서부터라는 것이다. 바로 평강공주라는 바보 말이다.

… 평강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해 왕은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 사대부의 아내가 될 수 없겠다.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 하겠다"고 놀렸다. 공주가 16세가 되자 왕은 상부(귀족)의 고씨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그러자 공주는 '임금은 식언할 수 없다'며 궁중을 나와 온달을 찾아 부부가 되었다. …

지극히 높고 고귀한 왕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평온한 삶이 보장되는 귀족의 삶을 버리고 평민 온달과 결혼한 평강공주는 사람들의 눈에 바보 중에서도 상바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평강공주의 생각은 달랐다.

우선 그녀가 생각했던 것은 비록 농이라 할지라도 왕권의 엄격함과 절대성이 지켜져야 하는 당시 상황에서, 왕의 말은 반드시 지켜져야 할 원칙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더불어 평강공주는 온달의 바보스러움에 대한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그 바보스러움은 원칙과 인간의 도리를 지키고자 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당당함과 고집스러움이었다. 눈 앞에 있는 잠깐의 영화로움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정의로움에 신뢰를 가질 수 있기에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과 동정의 눈길에도 묵묵히 제 할 일을 할 수 있는 힘이었다. 온달이 지닌 그 힘을, 평강공주는 볼 수 있었기에 세간의 평에 구애치 않고 바보 남편을 당당한 '장군 온달'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수많은 '지성인', 즉 '똑똑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산다. 그들은 하나의 문제가 발생하면 그에 대해 분석하고 논의를 하며 대안을 내놓는다. 그리고 그 대안에 대하여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지성인'이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대중들의 시선 속에 위치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보통 사람들의 말을 쓰기 시작하면 세간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 아니 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에이, 그 정도 얘기는 나도 할 수 있겠다."
"뭐, 그거야 우리가 소주 한 잔 하면서도 나눌 수 있는 얘기 아냐?"

혹여나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 이러한 평가가 나온다면 '지성인'은 견디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대중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서 그들을 '깨우쳐'주고 '인도해'주어야 하는 것이 '지성인'의 본연인데, 대중과 동급으로 취급받는다면 어찌 그들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즉 '지성인'에게 보통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것은 참기 힘든 치욕에 가까운 것이다.

특히나 '지성인'들 사이에서 그러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한 '지성인'에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이다. 계몽의 대상인 대중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그는, '지성인 사회'의 품격을 떨어뜨리며 그들의 고고한 정신세계를 좀먹는 암적 존재이다.

그래서 '지성인 사회'는 자신들과 다른 언어를 쓰는 이방인을 제거하고자 한다. 그렇게도 수준이 높은 말만 주고받는 입에, 저잣거리에서 떠도는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욕설을 올리며 그를 배제시킨다. 그렇게 배제된 이는 대중의 사회에서도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왜…?"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이지. 저렇게 뻗대 봤자 제 가족 고생만 시키는 일인데 말이야."

그렇게 '지성인'의 언어를 보통 사람의 말로 옮기고, 자기의 안락을 버린 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는 사람을 우리는 '바보'라고 불러왔다. 제 혼자,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면 편할 것을 사서 고생하면서, 평범하게 사는 우리네 보통 사람의 양심을 찌르는 '못난 사람'에 대한 원망을 담아 그렇게 부른 것이다.

하지만 그 원망과 그 비웃음, 동정을 산 이들이 세상을 바꾸어 왔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도저히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역사의 수레바퀴 앞에 맞선 사마귀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깨지지 않을 바위에 부딪히는 계란의 신세가 되더라도, 나 이외의 누군가가 함께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역사의 진보를 위해 몸을 던진 바보가 이 세상을 이끌어 왔다는 사실을 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능란한 언변과 화려한 경력이 아니라 '바보'의 진정성이었음을 알기에 우리는 '바보'를 사랑하고 그처럼 되고자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디지털 경성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디지털 경성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바보 #온달 #지성인 #역사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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