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째보선창 부근에 있는 ‘진한여관’ 간판. 아무리 머리를 굴리며 생각해도 주인 마음을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조종안
군산 째보선창 부근에 있는 여관 간판입니다. 부족국가 이름을 붙였을 것 같지는 않고, '사랑을 진하게 나누는 여관'이라는 뜻인지, '진안'을 '진한'으로 잘 못 쓴 것인지, 여관 주인 부부가 남편은 '진' 씨이고 부인은 '한' 씨여서 '진한'이라고 했는지, 상상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다 저녁을 먹고 부둣가에 산책하러 나가면, '고군산여인숙', '한산여인숙' 등 생선이나 젓갈을 사러온 인근 섬과 충청도 사람들이 묵었던 여인숙 간판들이 백열등 아래에서 졸고 있어 '파시 때는 강아지도 1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흥청거렸던 동네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50∼60년대까지만 해도 여관에서는 손님에게 밥을 제공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막집 분위기가 많이 났지요. 점치는 사람들이 여관이나 여인숙에 '○○철학관'이라는 간판을 걸고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씩 묵기도 했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 손을 잡고 따라갔던 기억이 새롭네요.
친하게 지내던 급우 아버지가 전남 광주와 군산에서 호텔과 여관을 경영했기 때문에 여관 밥을 먹어본 적이 있는데요. 간결하면서도 맛깔스럽고 개운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여관에서 아침을 먹고 왔다는 외당숙에게 "여관 밥은 비쌍게 세 끼니 밥은 집이 와서 먹어!"라고 하시던 어머니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습니다.
일면식도 없으면서 한 집(여관)에서 먹고 잔다는 이유로 옆방 손님과 흉허물없이 지내고 주방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수작을 거는 아저씨도 있었는데요.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되고 여관 주변에 다양한 식당이 개업하면서 손님들이 자신의 구미에 맞는 음식을 불러 먹기 시작하자 점차 그러한 풍경도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여관을 경영하는 지인의 말을 빌리면 출장을 오거나 가족이 묵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거나 이상한 관계로 보이는 손님들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예전에는 하룻밤을 자고 가는 손님이 많았고 여관 주인도 그래 주길 원했는데, 지금은 길어야 몇 시간 머물다 간다고 하더군요.
고향동네 이발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