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출마 연설"비겁한 역사를 끊겠다" 2001년 12월10일 힐튼호텔.
오마이뉴스 이종호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습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 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해야 했습니다.
눈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주었던 제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면서 살아라'였습니다.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그만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였습니다.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의 600년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 번 쟁취하는 우리 역사가 이뤄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들의 '비겁한 교훈'을 당당한 교훈으로 바꿔보자는 것이었다. "떳떳하게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정의가 승리하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정의가 승리하는 사회. 노무현은 스스로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그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고졸 출신 변호사로 정계에 입문했던 비주류 정치인이, 어려움 속에서도 원칙을 지켰던 그가 대통령 자리에 오름으로써, 정계 최고의 성공을 보여줌으로써, 젊은이들과 아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노무현은 왜 죽은 링컨을 만난 것일까정의가 성공하는 사회. 정치인 노무현이 그것을 얼마나 갈망했는지는 그가 미국 대통령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을 열애한 이유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대선출마선언 한 달 전인 2001년 11월 펴낸 책 <노무현이 만난 링컨>(학고재)의 서문 '왜, 다시, 링컨과 만나야 하는가'에서 이렇게 적었다.
"링컨이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은 정치에 입문한 뒤였다. 기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어왔다.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했다. 나의 답은 다른 이들도 흔히 꼽는 것처럼 김구(金九) 선생이었다. 김구 선생은 생을 마칠 때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지조를 지킨 지사였기 때문이다. 우리 한민족에게 벗어나기 힘든 운명처럼 다가온 분단에 끝까지 맞선 분이 김구 선생 아닌가. 누구나 존경하고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김구 선생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존경할 만한 사람은 왜 패배자밖에 없는가'하는 의문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왜 패배했는가? 역사에서 올바른 뜻을 가진 사람은 왜 패배하게 되는가?" 이런 질문은 '우리 역사에서는 정의가 패배한다'는 역설적 당위로 귀착됐고, 나는 그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패배하는 정의의 역사 ―. "
정의가 패배하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김구 대신 다른 인물을 찾아 나섰다. 정의가 승리하는 것을 보여주는 자, 성공한 김구를 찾아나섰다. 원칙을 지켰으나 거듭 패배자가 된 당시의 그로서는 절박한 것이었다.
노무현이 링컨에 반하게 된 것은 2000년 4월 13일, 국회의원 총선 개표가 진행되고 있던 날 밤이었다. 당시 그는 지역주의 타파를 부르짖고 민주당 후보로 부산에서 출마했다. 그가 개표의 밤에 패배를 예감하고 있을 때 우연히 접한 책 <세계를 감동시킨 위대한 연설들>(월간조선, 2000년 4월호 별책단행본)을 통해 링컨을 만난다. 다시 서문을 보자.
"정치현실에서 나는 늘 쫓기는 입장이었다. 나의 결정이 올바른 선택이라는 이야기를 항상 들었지만 1992년 총선에서도,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도, 1996년과 2000년 총선에서도 계속 떨어졌다. 당에서도 힘없는 비주류였다. 나는 초심으로 돌아가서 물었다. '옳다는 것이 패배하는 역사를 가지고, 이런 역사를 반복하면서, 아이들에게 옳은 길을 가라고 말하고 정의는 승리한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공허한가?' 이 자문의 틈을 자연스레 비집고 올라온 것이 링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