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도전 48년만의 첫승. 황선홍 선수가 전반 26분 선제골을 터트린 후 환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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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눈물 나게도, 안타깝게도, 거기까지였다. 내 왼쪽으로부터 '무언가'가 달려든다. 경기 중엔 내 왼쪽으로부터 사물놀이패의 '흥겨움'이 날아왔었지만, 이번엔 '흥분한 무언가'였다. 그때 내가 그 '무언가'로부터 느낀 두려움은 군대시절 야외훈련을 나간 깊은 밤에 똥을 누러 홀로 산 속에 자리 잡았다가 멧돼지와 1미터 앞에서 얼굴을 맞닥뜨렸던 두려움과 절묘하게 겹쳐든다.
그 '무언가'는 바로 사람 A씨! 그는 상당히 상기된 얼굴과 숨결과, 목소리로 내 손에 있던 황새의 유니폼을 거칠게 잡아당긴다. 바로 전 여러 명 사이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던 줄다리기인데, 이제서야 갑자기 줄다리기가 발생했다. 달려든 기세가 가히 엄청나다.
결국 나는, A씨를 당해내지 못했다. 1초 전까지만 해도 바로 내 손 안에 있었던 그 축축한 유니폼, 그는 전리품을 그러잡고 잽싸게 왔던 그 방향으로 되돌아간다. 그에게는 줄다리기, 나에게는 강탈.
그때 내 나이 스물. 난 너무 어렸고, 너무 어수룩했다. 내가 좀 더 세상을 알고, 좀 더 세상을 경험했었더라면 그렇게 내 선물을 허망하게 '뺏기진' 않았을 텐데…… 아득바득 버티거나 차라리 싸우기라도 했을 텐데……
그렇다, 앞서도 언급했듯 이런 기억의 재구성은 지나치게 나의 주관에만 치우쳤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 글을 읽어주신 분들이 내 이야기에 얼마나 공감을 해주실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멧돼지처럼 나타났다 매처럼 사라져간 A씨를 바라보며 나는 그저 망연자실이었다. 그저 그 자리에 넋 놓고 멍하니 서있었다. 누구 절 도와줄 사람 없나요? 주변을 찬찬히 둘러본다. 내 옆자리에 앉았던 아저씨, 나와 눈이 마주치고 내게 말을 건넨다.
"야~ 됐어, 그냥 일루와 앉어~ 그냥 줘버려~ 인생이 원래 다 그런거야~". 인생이 원래 다 그런거야. 인생이 원래 다 그런거야...... 나는 어쩌면 그 순간, '삶의 허무'의 5할을 배웠고, '세상이 이상이 아닌 냉혹한 현실주의임'의 4할을 배웠다.
어쨌든 '인생이 원래 다 그런거야' 아저씨가 보이신 반응과 그날 함께 경기장 옆자리에 있었던 내 친구의 반응 - 지금도 만나면 그때 "너가 억울했다"를 넘어 "우리가 억울했다"라고 회상하는 반응을 생각해 본다면, 나의 '주관적'인 이 글의 내용에 '객관성'이 조금은 보태질 수 있으려나.
아무튼, 그랬다. 나는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 천국발 지옥행 급행열차. 이건 단순한 관용구 수사가 아니다. 이해가 가겠는가. 축구에 미쳐 살던 나, 월드컵 첫 승, 그 현장, 그 감동의 순간. 그럼에도 난, 기쁘지 않았다. 더 이상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왜 그토록 기다리던 월드컵 첫 승의 순간에 나는 기쁘지 않을까. 어떻게 보면 (유니폼을 향한) 내 개인의 욕망과 집착 때문에 (월드컵 첫 승이라는) '우리'의 기쁨을 외면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내 안의 아집을 떨쳐내고, 이 순간 함께 첫 승의 뒷풀이를 즐길 수는 없을까.
아마도 '전국민'이 기뻐했을 그 순간에, 나는 수도승의 고뇌에 빠졌다. 황선홍 선수의 유니폼과 함께 내가 느낀 첫 승의 감동은 그렇게 증발해버렸다.
'인생이 원래 다 그런거야~'란 말의 씁쓸함내 마음의 지옥의 밤을 보내고 아침에 눈을 떴다. 이제는 욕망과 집착이 좀 가라 앉았으려나. 그러나 하늘에 해가 떴듯, 내 마음 속에는 '유니폼'이 떠버렸다. 아, 다시금 성직자의 고뇌.
당시는 떠나간 사랑의 아픔보다 떠나간 '유니폼'의 아픔이 훨씬 애절했고 따라서 당시의 고뇌를 담아 쭉 글을 쓰기 시작했었다.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길 바라며, 누군가가 공감해주길 바라며. 그런데 당시만 해도 인터넷공간이 지금과 같이 활발하진 않았으며, 난 그 활용방법도 잘 모르고 있었다. 나의 글을 올렸던 곳은 단지 붉은악마 자유게시판. 언제인가 다시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너무 오래전 글이라 이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당시에 글을 쓰던 심정으로 한 자 한 자 더한다. 이번엔 과연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려나, 과연 누군가가 공감해주려나. 모르겠다.
2002년 월드컵, 6월 4일, 부산, 폴란드전, 황선홍의 골, 한국의 첫 승, 스무 살의 나.
그 시절 그 때, 황선홍이 벗어던진 유니폼 상의. 무엇보다도 내 생에 최강 환희의 선물 그리고 동시에 최강 좌절의 선물. 그래도 그 기억에서 많이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해왔는데,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 결단코 쉽지 않은가 보다. 나는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일뿐인 것이다. '인생이 원래 다 그런거야~', 씁쓸함이 입안을 감돈다.
A씨께 보내는 쪽지"A씨, 안녕하세요. 이미 한참 지난 일을 가지고 왜 굳이 지금 언급하는지, 기분이 상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넓은 마음으로 제 안에 똬리 튼 욕망과 집착을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씨, 그냥 한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괜찮으신지요? 황선홍 선수의 유니폼을 선생님의 손에 쥐게 되신 그 순간, 어떠셨습니까, 어떤 감정이셨습니까? 선생님께는 기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까? 아니면 당신은 나와의 '추억'을 깡그리 잊으셨습니까? 저는 당신으로부터 '인생이 원래 다 그런거야~'란 씁쓸함을 배웠습니다. 약속합니다, 노력하겠습니다. 저의 아랫세대들에겐 '인생이 원래 다 그런거야~'란 말이 결코 대물림되지 않도록, 그런 삶을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