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대통령 닮은 바보꽃들이 피어있더이다

[슬라이드] 25일, 봉하마을 이모저모

등록 2009.05.25 21:49수정 2009.05.25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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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이른 새벽, 먼 길을 달려갔습니다.

봉하마을 초입에서 당신의 영정이 있는 봉하마을까지 걸어가면서 아직도 모내기를 하지 못한 텅 빈 논을 보았고, 열매를 맺으려고 거반 꽃이 다 진 찔레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익어가는 딸기와 한창 피어나기 시작하는 개망초도 보았지요.

 

어쩌면 그렇게 다 당신을 닮은 것들인지 모르겠습니다.

텅 빈 논도, 지는 꽃도 바보들이지요.

그렇게 천대를 받으면서도 끝내 살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바보같은 존재들이지요.

 

바보를 추모하기 위해 이어진 행렬속의 바보들, 당신을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에 부끄러워 봉하마을로 들어가는 한걸음 한걸음이 너무도 무거웠습니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근조' 리본을 받고, 방명록에 글 몇 자를 남기는데 가슴이 아픕니다. 당신 영정 앞에 서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그래요, 20년 전 친구가 갑작스럽게 죽었을 때 울어보고 처음으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당신 소식을 듣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을 그렇게 사랑해서가 아니라  도대체 한 사람을 그렇게 죽음까지 몰고가는 이 사회의 망령은 무엇일까 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당신뿐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수많은 이들을 누가 죽인 것일까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당신만큼은 스스로 목숨을 놓지 않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당신을 사지로 몰고간 그들도 그렇게 믿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주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조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깡패같은 아이들이 검은 양복을 입고 줄지어 서있습니다.

무슨 경호단체 같은데서 단체로 조문을 왔나보다, 하고 기특해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어떤 나으리가 오시는데 경호원들이라고 합니다. 결국 경호원을 동원했지만 그 양반 들어가지도 못하고 돌아섰다네요.

 

자기 혼자 조문하지 못할 것이라면, 조문했다가 상주들의 마음이 심히 상하게 할 것이라면 하지 말아야 예의지요. 자기만 자기 할 일하겠다면서 상주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것은 또 무슨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가야할 때와 가지 말아야 할 때를 구별하는 것도 지혜인데, 지혜는 나이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인가 봅니다. 괜시리 트집이나 잡을까 싶어 큰 맘 먹고 받아줘야 하는 이상한 조문객은 도대체 뭘까 싶습니다.

 

봉하마을을 산책하면서 당신도 보암음직한 들풀들과 꽃들과 나무와 풍경들을 가만가만 살펴봅니다. 뭐 그렇게 잘난 것들이 없습니다.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길 치고도 포장도 잘 되어있질 않습니다. 외래종 조경화라도 길가에 심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런 것도 없고 개망초, 메꽃, 찔레, 딸기꽃 같은 것들만 피어있습니다. 그냥 별/볼/일/없/는/꽃들이지요.

 

그런데 말이죠.

개망초 나물, 하얀 메꽃뿌리, 연한 찔레순, 빨간 딸기 모두모두 허기를 채워주던 것들이네요. 자기를 바쳐 보릿고개를 넘던 이들의 허기를 달래주던 바보꽃들이네요. 그 바보, 당신이 가장 맘에 든다던 그 바보들 말입니다.

2009.05.25 21:49ⓒ 2009 OhmyNews
#노무현 #봉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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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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